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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월드리포트] 도쿄 전범재판 70년…'한국'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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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5월3일 오늘(3일) 일본 도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전쟁범죄를 묻는 '도쿄 전범재판'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오늘자 일본 신문들은 이보다는 오늘이 69주년 헌법기념일이라는 사실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아베 총리가 올 여름 참의원 선거에 승리할 경우 본격적인 헌법개정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신문들이 여론조사를 벌였는데, 아사히 신문의 조사에선 '개헌이 필요가 없다'는 대답이 55%을 차지했습니다. 마이니치 신문도 전쟁금지를 규정한 일본 헌법 9조의 개정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52%였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도쿄 전범재판 70년 관련 기사는 어제(2일) 아사히 신문이 3,10면에 다룬 정도에 불과합니다. 지난해 2차 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수많은 역사 관련 기사들이 쏟아진 탓일 수도 있지만, 역시 올해 기사가 다소 부족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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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전범재판은 5월3일 처음 시작해 48년 11월4일 판결 선고까지 무려 2년 6개월이 걸렸습니다. 주말을 포함해 거의 매일 공판이 열렸고, 증인 419명, 진술서 779개, 증거문서 4,336개가 제출됐습니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기소한 원고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인도, 필리핀, 호주, 캐나다, 네덜란드, 뉴질랜드 등 11개국이었습니다.

도쿄 전범재판을 위해 구성된 국제검찰국의 공식 검사는 11명으로 미국 검사 조셉 키넌이 수석검사이자 검찰국장을 맡았습니다. 이들 외에도 각국은 보조검사와 수사관들을 파견했고, 전체 국제검찰국의 규모는 100명을 넘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원고국에 포함되지 못해 단 한 명의 검사나 수사관도 파견하지 못했습니다.

도쿄 전범재판은 1946년에 처음 열렸지만, 전범 조사는 훨씬 이전부터 이뤄졌습니다. 1943년 10월 유엔전범위원회가 개설되었습니다. 이 위원회는 수많은 조사단을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파견하였습니다. 이 위원회가 45년 8월 내놓은 '전범 백서'가 도쿄 전범재판의 기본 자료로 활용됐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 조사단도 일제시기 우리나라의 피해는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제의 만행은 국제적 범죄 조사는 물론 정식 기소도 이뤄지지 못한 겁니다. 일본 주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맥아더 사령관은 초기 전범 용의자로 120여 명을 체포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도쿄 전범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사람은 28명에 불과했습니다. 도쿄 전범재판에선 증인과 진술서, 관련 문서를 통해 수많은 전쟁 범죄들이 폭로됐습니다.

1) 만주국 황제 부의는 직접 증인으로 나와 일본 관동군의 살해 위협 속에 만주국을 세웠다고 고백했습니다.
2) 일본 육군소장 다나가 류키치는 1937년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된 노구교 사건은 사실 일본군의 음모였다고 폭로했습니다.
3) 중국 난징대학병원 외과의사였던 미국인 로버트 월튼은 난징 대학살을 증언했습니다.
4) 선전포고 없이 미국 진주만을 공격해 4천여 명을 숨지게 한 진주만 공격도 전쟁범죄로 다뤄졌습니다.
5) 이밖에 중국, 싱가포르, 호주, 버마 등의 점령지에서 일본군이 저질렀던 학살과 잔혹행위 등에 대해서도 기소가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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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전범재판은 극동 국제전범재판의 하나로 열렸습니다. 같은 시기 전세계 49개 법정에서 일본의 전쟁범죄가 다뤄졌습니다. 일본 밖에서만 5천600여 명이 전범 혐의로 기소돼 4천400여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1천여 명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중국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일대에서의 위안부 관련 기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우리나라의 사례는 조사되지 않았습니다.

도쿄 전범재판은 1948년 11월4일 판결선고가 시작돼 무려 1주일간 판결선고 낭독이 계속됐습니다.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7명에게 교수형이 선고됐고, 16명에게는 종신형 등이 선고됐습니다. 정신장애로 인정돼 기소를 면한 일본의 우익 사상가 오카와 슈메이가 재판중 갑자기 도조 전 총리의 뒷머리를 때리는 장면은 큰 화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영상 보러가기

도쿄 전범재판은 끝난 뒤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재판관 11명 가운데 2명은 재판 종료 후 개인 의견서를 통해 검찰 측이 히로히토 일왕을 기소하지 않은 것을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이밖에 737 생체실험 부대의 만행, 전쟁에 협조한 일본 기업들에 대한 기소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전범으로 체포됐던 인사들 가운데 기소되지 않았던 사람들은 당초 2차 전범재판의 대상이었지만,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추가 재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사실상 사면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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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신문은 2일자 기사에서 "법정에서 여러가지 증거와 증언을 통해 국민에게 전쟁의 실상이 알려졌다. 중국 난징에서 있었던 일본군에 의한 일반인 학살에 대해 피고석에서 생생한 증언을 들은 시게미츠 마모루 전 외상은 '추태 이야기가 귀를 더럽게 했다. 일본의 혼은 부패한 것인가'라는 심경을 일기에 적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쿄 전범재판 후 70년을 맞은 지금 일본 내에선 점차 우상화되는 전범들의 모습(사진)은 볼 수 있지만, 전쟁 범죄의 피해자들을 볼 수는 없습니다. 피해자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모르는 전후 세대에게 A급 전범의 사진은 T셔츠에 새겨 다닐 수 있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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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에서 '도쿄 전범재판 70년을 제대로 바라보고, 피해자들의 아픔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는 이제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자민당은 지난해 12월 당내에 '역사를 배워 미래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이곳에서 도쿄 전범재판, 난징대학살 등 과거 역사에 대해 재평가를 하겠다고 합니다. 아직 정부 차원의 조직은 아니지만, 언제든지 전환이 가능합니다.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할 숙명을 지워선 안된다." 아베 총리의 종전 70년 담화를 끝으로 더 이상 역사 반성은 필요없다는 인식이 일본 사회에 빠르게 퍼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최호원 기자 bestiger@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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