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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취재파일] "건축의 본질은 비바람을 막아주고 무너지지 않는 것"…김종성 건축가 인터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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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축의 교과서’, ‘건축계의 살아 있는 전설’, 모두 김종성 건축가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다소 진부할 수 있는 표현이지만, 건축학자들은 그를 설명할 다른 말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김종성 건축가는 ‘우리나라 건축 1세대’로 미국 일리노이공과대학에서 건축학 학사·석사학위를 수료했습니다. 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세계 근대건축 3대 거장 중 한 명인 루드비히 미스 반데어로에 (Ludwig Mies van der Rohe)에게 교육을 받고, 그가 운영하는 건축연구소에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일리노이공과대학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서울 ‘힐튼 호텔’ 설계를 맡아 모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귀국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며 서울역사박물관, 종로 SK사옥, 경주 선재박물관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설계했습니다.

한국건축가협회는 ‘한국 모더니즘 건축학을 이끌었다’는 공로로, 2014년에 김종성 건축가를 ‘제1회 한국건축가협회 골드메달’ 수상자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명실상부한 ‘국가대표 건축가’로 평가받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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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생에 가장 큰 도전에 다시 나섰습니다. 서울 삼성동 한전부지에 들어설 현대차그룹 통합사옥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의 설계책임자로 선임된 겁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거 같은 그런 건축물을 만들고 싶다”라는 그는 어떤 ‘대작’을 구상하고 있을까요?

햇살이 따사로운 오후, 직접 설계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김종성 건축가를 만났습니다. 여든이 넘은 고령에도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갈색 뿔테 안경, 잘 빗어 넘긴 머리가 엄격해 보였지만, 건축에 대해 얘기할 때는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소년 같은 해맑은 미소와 함께 두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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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차그룹의 글로벌비즈니스센터 설계 책임을 맡게 됐습니다. 소감이 어떤가요?

= 나는 54학번이에요.(웃음) 횟수로 치면, 건축을 공부한 지 62년이 된 거죠. 그동안 쌓아온 경험, 노하우 이런 것들을 한 번 쏟아보자, 최선을 다해볼만하다,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이런 대형 프로젝트는 단순히 설계만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사업을 이끌어갈 경영능력도 중요해요. 그런 점에서 나는 그동안 대형 설계조직을 이끌어온 경험이 있으니까, 그런 점을 높게 봐서 연락을 준 거 같아요.

나는 이제 학부졸업하고 대학원 다니면서 맡은 첫 큰 프로젝트가 캐나다 토론토 도미니언 은행도 본점 설계였어요. 그 사업도 세계적인 기업의 본사와 사무용 건물 등이 들어갈 복합단지를 짓는 거였는데, 이번에 맡은 현대차 글로벌비즈니스센터(이하 GBC)와 성격이 비슷해요.

자랑 같지만, 이후로도 이런 큰 프로젝트를 많이 했었죠. 또, 미국에서 교수하면서 우리말과 영어가 능통하니 각국에서 온 건축가들과 소통도 자유롭고요. 그래도 나도 생각을 좀 해야 했고, 몇 달 동안 서로 대화하면서 “그럼 한 번 해보자” 그런 결론에 도달했어요.

- 부지 매입에만 10조 원이 넘게 들었고, 총 면적도 92만 8천 제곱미터가 넘는 말 그대로 ‘초대형 프로젝트’입니다. 구상 중인 콘셉트가 있으신가요?

= 역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세계적 기업인 현대자동차그룹의 위상에 걸맞은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회사의 CI(corporate identity)를 만들어야 한단 거죠. 그만큼 건물이 현대차그룹이라는 기업 이미지를 잘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옆에 있는 제2롯데월드 빌딩과 높이 싸움을 할 생각은 없어요. 정몽구 회장님도 그런 높이 싸움은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오랜 시간 기획해서 나온 게 높이는 105층 정도로 하자. 그게 제일 비례가 잘 맞는다고 판단했어요.

부지가 서울 강남 한가운데라 그곳엔 현대차그룹 본사뿐 아니라 다른 업무시설도 들어가야 해요. 그래야 주변 상권도 살고, 업종 간 시너지 효과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5층짜리 건물 옆에 낮은 건물을 또 하나 지을 겁니다. 높이는 45층에서 52~3층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거기엔 무궁화 여섯 개짜리 호텔이 들어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차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는 부대시설도 꼭 넣으려고 생각 중입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게 이 건물이 서울시민, 더 나아가서는 우리 국민 모두에게 이바지할 수 있는 공공적인 시설물이 되도록 해야 한단 겁니다. 이건 건축하는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목표이기도 하지만, 정몽구 회장의 뜻이기도 합니다. 언제든 시민에게 개방돼 있고, 시민이 편하게 활용할 수 있는 그런 문화공간, 공연시설이 들어가야 한다는 게 확고한 생각입니다.

- GBC엔 대규모 컨벤션센터도 들어간다고 들었습니다.

= 네, 맞아요. 믿기 어렵겠지만 서울이 세계적 회의나 대규모 전시회를 유치하기엔 컨벤션시설이 부족한 편입니다. 바로 길 건너에 코엑스가 있긴 하지만, 서울에서 코엑스만으로 이 많은 국제회의와 전시회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아요.

경기도 고양에도 킨텍스가 있긴 하지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게 단점이고요. 코엑스나 킨텍스랑 경쟁하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수도 서울에 컨벤션시설을 확충하는 게 목표입니다.

- 설계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 설계는 2년 전부터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 년 전쯤에 건물을 설계할 조직 두 군데를 선발했습니다. 하나는 앞서 얘기한 105층 사옥을 설계할 ‘스키드모어오윙스앤드메릴(SOM)’이라는 회사고, 나머지는 자동차 전시관, 공연장, 작은 사무실, 호텔, 작은 규모의 컨벤션을 설계하는 NBBJ라는 회사입니다.

‘SOM’은 두바이 ‘부르즈 칼리파’를 설계한 회사고, ‘NBBJ’는 아마존 새 본사 설계를 맡았습니다. 제가 할 일은 이 두 회사가 잘 조화를 이뤄 건물을 설계하도록 조율하는 일이죠. 두 회사가 따로 엇박자를 내지 않게 방향을 잘 잡아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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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후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건축학을 전공

김종성 건축가가 열다섯 살이 되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어렵게 돌아온 서울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습니다. 집은 모조리 불타 없어졌고, 삶의 터전을 잃은 시민은 무허가 판자촌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폐허가 된 도심을 보며, 청년 김종성은 건축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그런 결심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했고, 입학 2년 만에 모더니즘 건축 거장 ‘루드비히 미스 반데어로’를 찾아 다시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그의 애제자가 됐고, 졸업 후엔 11년 동안이나 미스의 사무실에서 근무했습니다. 이후 모교인 일리노이 공대에서 건축학 교수로 재직하던 1978년, 남산 자락에 ‘힐튼 호텔’을 지어달라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요청을 받고 서울로 돌아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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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해서 건축에 관심을 두게 됐나요?

= 1950년 6·25전쟁이 터져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돌아왔어요. 돌아와 보니, 서울은 처참했습니다. 도심의 절반 정도가 파괴돼 있었죠.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1년 뒤면 대학진학을 결정해야 하는 시기였는데,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죠. “서울에 번듯한 건물을 짓고 싶다.” 사실, 그땐 ‘건축’이란 게 뭔지도 몰랐지만, ‘뭔가 새로 만드는 것, 그건 좋은 거다’라는 생각은 했었어요.

어린 나이에도 그런 생각은 확실히 들었던 거 같아요. 물론, 도심을 복원하려면 토목을 공부할 수도 있었지만, 그땐 예술적인 감수성이 있었어요. 그래서 서울대 건축학과에 입학하게 됐어요.

- 어렵게 대학에 들어갔을 텐데 졸업도 안 하고 2년 만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 사실, 그때는 대학에서도 공부할 자료가 별로 없어요. 건축과 독서실 가면 석 달 정도 지난 외국 건축 잡지가 한 권 있었는데, 입학 동기 40명이 그걸 어렵게 구해서 돌려가며 읽곤 했었죠. 배움, 지식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아, 난 외국에 가서 공부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엔 우리 정부가 이공계는 학부에서 2년을 공부해야 유학을 갈 수 있게 했어요. 인문계는 4년을 다 다녀야 했고요. 그래서 2년 마치고 바로 유학을 준비했고, 갈 수만 있다면 존경하는 ‘미스 반데어로에’가 교수로 있는 미국 일리노이 공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미스 반데어로에 교수의 어떤 점에 매료된 건가요?

= 제가 대학 시절, 지금 중앙우체국 옆에 헌책방들이 많았는데, 거기서 우연히 ‘현대 건축의 소개’라는 책을 접하게 됐어요. 그 책에 미스의 건축물이 몇 개가 소개돼 있었어요.

미스는 르 코르뷔지에, F.L.라이트와 함께 20세기 건축계를 대표하는 최고 거장인데, 나머지 두 명과 다르게 유독 미스의 작품이 우리나라 목조 건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어릴 때 자라나면서 봤던 ‘기둥에 보를 세우는’ 그러한 기법으로 건물을 지었더라고요.

대부분 서양 근대 건축가는 조각가가 석고를 이용해 빗어낸 듯한 건물을 짓는데, 미스의 건물에는 한옥에서 볼 수 있는 기둥과 보, 서까래의 흔적이 보였습니다. 우리의 문화와 닮은 미스만의 독특한 건축 언어에 반했고, 꼭 미스가 가르치는 일리노이 공대를 가야겠다 싶었습니다.(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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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파일] "건축의 본질은 비바람을 막아주고 무너지지 않는 것"…김종성 건축가 인터뷰 ②

[한세현 기자 vetma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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