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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설리의 도발 vs 걸그룹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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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스물셋, 20대 여자 연예인의 SNS는 언제나 ‘풍년’이다. 볼거리가 넘쳐 토를 달기 쉽다. 때로는 판타지이고, 때로는 공감이다. 팬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걸그룹 멤버의 역할을 벗은 설리의 일상도 수백만 개의 눈을 유혹하고 있다.

설리의 일상은 평범하다. 듬직한 남자친구와 산책을 하고, 여행을 간다. 가끔 침대에 누워 입을 맞추는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장난스럽게 입 안 가득 휘핑크림을 짜넣기도 하고, ‘절친’이라는 또래의 동성 스타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또 가끔 속옷이 살짝 드러난 사진도 올린다.

이젠 에프엑스의 전 멤버가 된 설리의 인스타그램은 지난 한 달 넘게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됐다. 설리가 올리는 사진들이 매일 수십, 수백 건의 기사로 만들어졌다. 설리의 이름이 난데없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면 심지어 업계 관계자들조차 “설리가 또 사진을 올렸다”며 외계 생명체를 보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금기시된 일을 하는, 기이한 행보를 가는 전 걸그룹 멤버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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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의 최근 모습이 유달리 부각되는 것은 설리가 가졌던 그간의 이미지, 수많은 걸그룹들이 보여준 전략전술과 철저하게 반대편에 서있기 때문이다.

아이돌그룹은 팬덤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의 팀이 가요계에 등장해 꾸준히 앨범을 발매할 수 있는 위치에 서기 위해선 이들을 한없이 지지해주는 팬덤의 확보가 절실하다. 그룹은 팬덤을 위해, 팬덤은 스타를 위해 서로의 요구에 충실하게 부응하며 신뢰관계를 형성한다.

에프엑스 출신 설리에게도 대중의 요구가 있었다. 걸그룹의 멤버답게 사랑스럽고 조신할 것, 연애는 금지요 팬들을 위해 존재할 것. 욕망의 대상으로 자리하되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지 말 것. 만들어진 판타지를 충실히 수행할 것. 설리는 암묵적인 약속을 깼다.

열두 살에 이병훈 감독의 ‘서동요’(SBS)에서 이보영의 아역으로 출연한 이후 SM엔터테인먼트에서 4년간 연습생 생활을 거친 뒤 걸그룹 에프엑스로 데뷔했다. 2009년, 설리가 만 열다섯이 되던 해였다.

하얀 피부에 유달리 아이 같은 외모로 데뷔 당시부터 설리는 ‘복숭아’로 불렸다.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소녀, 팀 색깔과는 무관하게 설리의 소녀다운 매력에 붙여진 별칭이었다. 과거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설리는 무대에서 다소 노출을 겸하는 안무가 있을 때 팬들이 “옷을 올리는 안무는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대중이 설리에게 요구했던 것은 알 건 다 아는 성인여성이 아닌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한 소녀였다.

다이나믹 듀오 최자와의 파파라치 사진이 공개되고, 열애설을 수차례 부인하다 2014년 교제를 인정한 뒤 설리는 지난해 8월 에프엑스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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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엿한 홀로서기 8개월차. 설리를 향한 여전한 대중의 요구는 놀랍게도 소녀성이었다. 설리는 그러나 자신을 ‘복숭아’로 규정하는 대중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스스로의 삶을 살고 있는 스물셋 설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겹겹이 쌓인 가공된 판타지를 하나씩 벗어버렸다. 지금까지 걸그룹 멤버, 혹은 여자 연예인이 이토록 자신의 일상을 낱낱이 보여준 적은 없었다. 전략이 아닌 다음에야 말이다. 인신공격성 악성댓글,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 자극적인 기사 타이틀이 줄을 잇는다. 순수했던 설리가 나이차가 많은 남자친구를 만나 순수성을 잃었다는 뉘앙스의 반응들이 매달려 음습한 미소를 드러낸다.

설리의 태도가 흥미롭다. 그 어떤 반응에도 미동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설리의 인스타그램은 설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의 일상을 낱낱이 드러낸다. 평범한 20대 여성들이 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챙겨야할 일상의 자유를 누린다. 청순하거나 섹시하거나, 극단적인 여성성을 보여줘야 하고 기왕이면 사랑을 주는 대상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일상을 까발리지 말아야 하는 존재였던 설리는 자신을 향한 그 어떤 ‘품평’에도 개의지 않는다. 단지 분실한 휴대폰 속 사진이 아까울 뿐이다. 설리는 또 다시 태연하게 일상의 사진을 전시했다. 1994년생 프랑스산 와인인 ‘샤토 디켐’에 입을 맞춘 사진이다. 이토록 요구사항이 많은 보수적이고 억압된 세계에 흥미롭고 신선한 20대 초반 여자 연예인이 난데없이 등장했다. 이보다 더 한 판타지가 또 있을까. ‘설리’가 ‘진리’였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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