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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나는 대한민국 OOO입니다(35)] 연극 출연료 10년째 2만원.. 그마저도 소속사 있는 '금수저'에 뺏길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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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연극배우, 대다수 月 100만원 못받고 월세 내면 병원비도 없어
10년차도 알바 떠밀리고 소속사 배우에 주연 밀려


#1. 요즘 청년들을 두고 흔히 하는 말들 있죠. N포세대, 흙수저, 열정페이. 온통 제 얘기예요. 저는 배우입니다. 대학로에서 2년째 연극을 하고 있어요. 극단에도 소속돼 있습니다. 정식 단원이 되고 첫 작품에서 회당 1만원도 못 받았어요. 그래도 질 떨어지는 상업극이 아닌 정극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버티고 있었죠. 그런데 요새는 이마저도 쉽지 않아요. 주 5일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경복궁에서 수문장 알바 끝나면 곧바로 극장으로 가서 공연 준비를 해야 하는데 체력이 남아나질 않아요. 피곤에 찌들어서 집중력이 흐트러지니까 무대에서 자신감도 떨어지고 악순환이에요. 연기라도 늘면 좋겠는데 일하느라 실력 쌓을 시간도 없어요. 미래가 안 보여요.(대학로에서 정극 연기를 하고 있는 남자배우 A씨)

#2. 남자배우는 그나마 좀 낫죠. 여자는 무대에 설 기회도 적어요. 제가 실력이 안 돼서 그런 거 아니냐고요? 제가 잘 아는 음악감독님이 이런 얘길 하시더라고요. "모든 여배우가 다 옥주현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래도 무대가 너무 '남자 판' 아니냐." 기획사 쪽에선 티켓을 팔아야 하니까 대형 뮤지컬 같은 경우엔 실제로 아이돌 캐스팅을 강요하기도 한대요. 아이돌이 아니라도 여성팬이 많은 배우를 뽑으라고요. 소극장 뮤지컬도 다르지 않아요. 주 관객층이 20~30대 여성이니까 기획사들이 남자배우 많이 나오는 작품을 선호하는 거죠. 출연료도 남녀 차별 있어요. 역할 비중이나 경력이 다 비슷한데 남자배우는 더 주더라고요. 티켓 팔기에 더 쓸모가 있다는 거죠.(뮤지컬·연극을 병행하고 있는 여자배우 B씨)

파이낸셜뉴스

지난해 6월 연극배우 김운하씨가 한 고시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던 일 기억하십니까. 사인은 병사. 생전에 고혈압, 신부전증을 앓았다고 합니다. 치료를 받을 돈도, 의지할 사람도 없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고독하게 세상과 작별했습니다. 며칠 뒤에 영화배우 판영진씨도 유명을 달리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죠. 시신이 발견된 차량 안에는 타다 남은 번개탄이 남아있었다고 해 주변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무대 위에 서는 연극배우.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하지만 무대 아래의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현실에서도 화려한 삶을 사는 배우들은 극히 일부일 뿐 배우의 세계만큼 빈익빈 부익부가 심한 곳도 없을 겁니다. 그래도 그렇지 버젓이 직업이 있는데 웬 생활고냐고요? 그렇게 물으신다면 할 말은 많습니다.

■회당 출연료 2만원, 생활고 극심

영화라도 하면 모를까 연극만 해가지고는 아무리 잘나가는 배우라도 여유로운 생활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2013년 서울문화재단의 '대학로 연극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대학로 연극인의 평균 월소득은 114만원이라고 합니다. 100만원 이하로 버는 연극인이 전체의 43%나 됩니다. 스태프를 제외한 배우의 평균 월소득은 이보다 더 낮은 100만원입니다.

지난달 한국감정원 조사에서 전국 주택 평균 월세가 55만9000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수도권은 69만2000원으로 더 비싸고요. 집값 내고 남은 돈으로 겨우 식비, 교통비 낼 수 있는 정도인데 아플 때 병원이나 제대로 갈 수 있겠습니까. 참고 버티다가 병을 키우는 거죠.

회당 출연료는 10년이 넘도록 2만~3만원에서 멈춰 있습니다. 잘나가는 상업극은 경력에 따라 4만~5만원씩도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런 작품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혀요. 지금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연극 중에 티켓 판매사이트에 등록된 작품만 50개가 넘습니다. 그나마 티켓 사이트를 통해 티켓을 판매하는 작품은 수수료를 낼 여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극장이나 극단 홈페이지, 심지어 배우 개인 블로그를 통해 알음알음 홍보하고 티켓을 판매하는 공연도 많습니다.

출연료를 받기나 하면 다행입니다. 최근에 모 기획사 대표가 한 극단의 공연 수익금을 들고 잠적한 일도 있었습니다. 극단 소속 배우 전부 출연료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죠. 다행히 극단 차원에서 작성했던 계약서 덕분에 법적 절차를 밟고 미지급된 출연료를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개인 자격으로 활동하는 배우들은 계약서를 쓰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희망 안 보이는 연극판 '흙수저'

상황이 이렇다보니 투잡, 스리잡은 기본입니다. 공연을 병행하려면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편의점, 주유소를 전전하고 공연이 끝난 뒤 새벽시간에 술집 서빙 알바를 하기도 합니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라면 부담은 더욱 커집니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한 경력 8년차 남자배우 C씨(34)는 아내와 여섯살 난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각종 배달일을 합니다.

연기 전공자의 경우 입시생 개인레슨 같은 '점잖은' 알바를 하기도 하고, 인맥을 통해 영화.드라마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합니다. 출연료는 연극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관련된 일이라는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무엇보다 열심히 하다보면 길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설경구, 황정민처럼 연극배우 하다가 대박나는 일은 옛날 일입니다. 이 바닥에도 금수저.흙수저가 확실히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의 꿈을 안고 이 바닥에 뛰어든 20~30대 젊은 배우들이 가장 절감하는 부분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금수저'는 소속사가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배우들입니다. 보통 상업극만 해서는 연극배우로서 인정받기 어렵지만 금수저들은 정극이든 상업극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오디션에 넣을 프로필에 경력을 추가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알 만한 상업극을 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5년차 남자배우 D씨(32)는 이런 금수저들을 볼 때마다 박탈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취준생들이 스펙 한 줄 추가하려는 것과 같아요. 잠깐 발 담그는 셈인 거죠. 그러니 열심히 안합니다. 저에겐 이 작품이 전부인데 상업극이라고 무시하더군요."

여자배우들의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10년차 여배우 E씨(35)는 남녀 배우 차별을 지적합니다. "대표가 얼마 주겠다고 약속하고서는 나중에 딴소리를 하는 거예요. '너 말고도 이 작품 하고 싶어하는 여배우들 줄 섰다'고요. 눈물을 삼키며 무대에 올랐죠."

흔히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긴다'고 하는데 얼마나 더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연극보다 더 연극 같은 연극판 현실입니다.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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