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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남 돕겠다는데… "이유가 뭐냐" 온갖 트집잡아 뺑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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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규제' 묶인 공익법인] [2부-1] 벽 높은 설립 절차

"사업 계획 이상" "서류 고쳐라" 공무원들, 사사건건 퇴짜

"대놓고 의심부터 하니… 좋은 일 하려다 진이 다 빠져"

조선일보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매년 4000여명의 저소득층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무료 과외 봉사를 하는 '미담장학회'의 장능인(27) 상임이사는 2014년 공익법인 허가를 받기 위해 대전시 교육청을 방문했다. "공익법인이 되면 기부금에 대해 세제(稅制) 혜택을 받을 수 있어 더 많은 기부를 끌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미담장학회는 장씨가 카이스트에 재학 중이던 2009년 만든 봉사 동아리로 시작해 현재 전국 12개 대학에 지회를 두고 있다.

하지만 장씨는 공익법인 허가를 받는 데 실패했다. 그가 사업계획서에 적은 '평생교육'이라는 항목이 문제였다. 무료 과외 봉사 이외에도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컴퓨터 강의 같은 평생교육도 하겠다는 뜻인데, 담당 공무원은 "평생교육은 교육청이 정한 '교육 기부'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신청서를 반려했다. 그는 "노인을 교육하는 건 교육 기부가 아니냐"고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8개월 동안 교육청과 씨름한 장씨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는 "좋은 뜻으로 공익 활동을 해보려고 해도 덮어 놓고 의심하고, 무조건 퇴짜를 놓고 보는 공무원의 태도에 힘이 빠졌다"고 했다.

현행 '공익법인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선 중앙부처나 지방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공익법인을 담당하는 관청은 공익법인 설립을 신청한 지 14~20일 안에 설립 허가 여부를 정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실제 걸리는 시간은 평균 1년에 달한다. 문구상 표현 등을 문제 삼아 허가 일정을 지연시키거나, 막 공익활동을 시작하려는 단체에 지난 2년간의 활동 내역을 보고하라고 지시하는 등 담당 공무원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돼 법정 기한보다 훨씬 긴 시간이 소요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 송파구에서 장학재단을 운영하는 김모(54·건설업)씨도 지난 2014년 관할 교육청에 장학재단 설립 신청서를 냈다가 낭패를 겪었다. 교육청에서 시킨 대로 법무사의 도움을 받아 사업계획서와 정관 등 10여 종의 서류를 냈지만 반려된 것이다. 김씨는 "나중에 알고 보니 담당 공무원이 실수로 재단 설립에 필요한 서류 1건을 빼먹고 알려주지 않았다"며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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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가 빠트린 서류를 챙겨 가자 이번엔 "문장에 오류가 있다"거나 "사업 계획이 분명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서류를 고쳐 오라"고 주문했다. 서류를 고치려면 발기인으로 참여한 50명 전원의 인감을 받아야 했다. 이런 일이 두세 차례 반복되자 "좋은 일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무보수로 이들의 일을 돕던 법무사도 '더 이상 못하겠다'며 그만뒀다. 김씨는 결국 800만원을 주고 변호사를 선임해 1년 만에 재단 설립에 성공했다.

전문가들은 공익법인 설립 시 적용되는 '허가주의'를 선진국처럼 '인가주의'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정 요건을 갖추면 무조건 법인 설립이 가능하게 하자는 것이다. 공무원들의 재량이 작용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누구든 자유롭게 공익법인을 설립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대신 설립 이후에는 모니터링을 강화해 제대로 공익활동을 한 재단에 대해서만 세금 감면 같은 각종 인센티브를 준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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