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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Why] 40년 앓다 일어났다… 사랑에 빠진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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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진 기자의 느낌] 신인 배우로 돌아온 '이만희의 여자' 문숙

첫눈에 반한 이만희 감독

스물세 살 연상 이혼남… 마주친 순간 심장 멎은 듯… "믿음 가는 완벽한 남자"

갑자기 떠난 사랑의 진통

결혼 직후 심장마비로 사별… 화가로 새 출발했지만 몸과 마음 계속 아파

1974년 5월의 화창한 봄날이었다. 스무 살 소녀 오경숙은 영화 오디션을 보러오라는 연락을 받고 화천영화공사 사무실 문을 조심스레 두들겼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런데 영화감독이 자리에 없었다. 그렇게 30분쯤 기다렸을까, 허둥지둥 키 큰 남자가 들어섰다. "아, 미안. 기다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영화 '만추' '삼포 가는 길' 등을 남긴 영화감독 이만희였다. 이 감독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소녀와 인사를 나눴고 천천히 소녀를 관찰했다. 그러고는 바로 카메라 오디션을 시작했다. 소녀는 당시 순간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춰진 느낌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심장이 멎는 듯 가슴에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당시 난 '오디션을 앞둔 긴장 때문에 이런 걸까'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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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 성곽길에서 머리에 하와이 꽃 장식을 꽂고 선 배우 문숙. 세월을 비켜 가지 않고 온몸으로 마주하며 지금의 평온하고 단아한 얼굴을 만들어왔다고 말했다. 시술도 화장도 하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그 어떤 여배우의 그것보다 우아하고 또 건강해 보였다. /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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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문숙(62·본명 오경숙)은 그렇게 고(故) 이만희(1931~1975) 영화감독을 운명처럼 만나 연인이 됐고 또 아내가 됐다. 스물세 살 연상 남자, 이혼남과의 만남…. 세상이 떠들기 좋아하는 얘기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내겐 그 사람 외엔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이 감독은 자신의 페르소나였던 여배우 문정숙과 문희에서 따온 성(姓)과 오경숙의 '숙' 자를 붙여 그녀의 예명을 지어줬다. 그러나 결혼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이만희 감독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문숙은 이후 미국으로 떠나 40여 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작년에서야 그녀는 한국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 출연했고 최근엔 TV 드라마 '기억'에서 '태선로펌'의 창업주인 황태선 역할로 나온다. 한 회 한두 장면밖에 나오지 않지만, 차갑고도 우아한 악역을 보여주는 그의 존재감은 날카로운 송곳 같다. 슥 하고 스쳐 지나가는 장면만 나와도, 포털 사이트와 시청자 게시판엔 물음표와 느낌표가 빗발친다. '방금 저분, 대체 누구인가요?'

문숙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문숙은 "봄이고 볕도 좋을 테니, 우리 그냥 성곽길에서 보면 좋겠다"라는 답을 돌려줬다. 26일 그를 연둣빛 신록이 물결치는 서울 성북동 성곽길에서 만났다. "만나보니 어때요. TV에서 보던 도도한 사람이 아니죠?" 물기 가득한 버드나무 가지처럼 탄력 있는 목소리, 입꼬리가 올라간 시원한 입매. 눈가엔 주름이 잡혔고 머리칼은 회색빛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은 화장기 없이 맑았다. 1974년 봄날에 영화사 사무실 문을 두들겼다는 그 소녀가 그대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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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영화 ‘미스 영의 행방’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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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던 독특한 얼굴

―최근 드라마에 고작 몇 장면만 나왔는데도 화제입니다.

"글쎄, 난 제대로 모니터를 하지도 않아서 내가 어떻게 나왔는지 몰라요. 집에 TV도 없고요. 촬영장에서 힐끗 한 번 봤나. 내가 카메라에 찍힌 옆모습을 슬쩍 보니 쭈글쭈글 할머니 같길래, '어머 저래도 되나' 그러고 말았거든요(웃음). 지금도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요. 앉으라면 앉고, 걸어가라면 걸어가고. 그래도 재미는 있어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잠시 산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거든요. 이것만 한 럭셔리(호화로운 체험)가 또 있을까 싶네요."

―드라마 제작자인 이정희 대표가 문숙씨를 처음 만나자마자 속으로 생각했다죠. '저 나이에 저런 표정과 저런 몸매, 저런 목소리와 눈빛을 가진 여배우가 어디 또 있겠는가' 하고요.

"에이, 요즘 세상에 나처럼 주름에 주근깨까지 있는 얼굴 그대로 TV에 나오는 사람이 어딨겠어요(웃음). 그치만 그래도 난 내 얼굴이 퍽 자랑스러워요. 주름이 많다는 건 그만큼 햇빛을 맘껏 보고 재밌게 살았다는 얘기거든요. 얼굴이 망가질까 걱정하지 않고 자연과 마음껏 호흡하고 살았다는 뜻이고요. 미국 플로리다, 뉴욕 맨해튼을 돌며 지내다가 최근엔 쭉 하와이 마우이섬에서 지냈어요. 거기서 잡초도 뽑고 바나나나무 누런 떡잎도 잘라주고, 열대과일 주워다 갈아 먹기도 하고 그랬죠. 화장할 시간에 명상했고 옷 사들일 시간에 하늘을 봤고…. 누구나 그렇게 살다 보면 얼굴이 편안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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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를 하고 있는 문숙. 그는 요가를 하면서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풀게 됐다고 말한다. / 문숙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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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를 오랫동안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감독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오랫동안 몸과 마음이 지독하게 아팠어요.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고 다시 결혼을 했고 두 아이를 낳았지만 어딘가 계속 아프고 괴로웠죠. 종교란 종교, 신이란 신은 다 찾아다녔어요. 정신과 의사를 몇 번 만났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요가를 시작했는데, 비로소 알게 됐죠. 아, 내가 아픈 이유는 내 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구나. 그런데 내가 그 원인을 밖에서만 찾아 헤매고 다녔구나."

―문제가 자기 안에 있다뇨?

"모든 문제는 내 몸 안에 있더라고요. 고통도 슬픔도 내 몸을 통해 풀어야 비로소 온전히 나아요. 명상도 그냥 하면 소용이 없어요. 30분 동안 눈 감고 있으라고 하면, 30분을 견디기가 쉽지가 않아요. 온몸이 다 쑤시고 아프고 답답하죠. 운동을 하면서 내 몸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스스로 치료를 시작하니까 명상도 비로소 잘 되더라고요.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는 게 그제서야 가능해지는 거죠. 이건 내가 겪었던 경험이 워낙 지독하고 치열했던 것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웬만한 종교 지도자의 말이나 심리치료사의 이야기는 내 안까지 영 와 닿질 않더라고요. 다들 딴소리만 하고 있는 거지. 오랜 방랑 끝에 알았어요. 결국 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내가 내 몸을 써서 내 안으로 파고들어야 비로소 낫는다는 걸…."

그토록 뜨거웠던 1년

1974년 이만희 감독은 문숙을 영화 '태양 닮은 소녀'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큼직한 눈동자, 짙은 눈썹….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이국적인 매력을 자랑하던 그였다. 당시 카메라 감독들은 "야, 너 엘리자베스 테일러 닮았다"고 말해주곤 했다. 화기애애한 촬영장이었다. 이 감독은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몇 명에게 조근조근한 말투로 부드럽게 지시를 하면 촬영장에 있던 모든 스태프가 물 흐르듯 움직였다고 했다. 배우 문숙에게도 이 감독은 한 번도 '연기'를 주문한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와 눈을 보고 "응, 지금 나를 그렇게 쳐다봤잖아. 똑같이 해봐" "방금 덥다고 얼굴을 문질렀잖아. 그걸 다시 해봐"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문숙은 "배우를 유심히 관찰하고, 그 배우의 내면에 있는 것을 뽑아내 영화로 옮기는 것이 이만희 감독이었다. 모든 배우가 완벽하게 그를 존경했고, 나 역시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고 했다.

―나이 차이가 꽤 났는데 대하기 어렵진 않았나요.

“어찌나 부드럽고 다정하게 대해주셨는지 몰라요. 내게만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그와 5분 이상 대화를 나눠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만희 감독이 나를 가장 믿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거든요. 그런 식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단단한 믿음을 심어주는 사람이었어요. 당시엔 사실 영화계 사람들이 여배우를 쉽게 대하는 분위기가 좀 있었는데, 감독님은 저를 완벽하게 보호해 주셨어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제가 잠들면 그 곁을 지켰죠. 전 그때 정말이지 24시간 동안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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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양 닮은 소녀’ 촬영장에서 문숙(왼쪽)과 신성일(오른쪽)을 두고 연기 지도를 하는 이만희(가운데) 감독 / 도서출판 샨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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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으로 보게 된 건 언제부터입니까.

“촬영을 하면서 서로에게 물이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됐던 것 같아요. 촬영이 끝나면 늘 집까지 절 바래다주셨고요. 나중엔 그마저도 헤어지고 싶지가 않았어요.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었죠. 그 무렵 감독님이 제게 ‘우리 집에 갈래?’ 하셨어요. 자양동 한옥집에 따라갔는데 거기에 홀어머니가 있고 감독님 아이들이 있더라고요. 감독님이 결혼을 했었다는 것도, 아이가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어요. 혜영이도 처음 만났고요. 날 보고 배시시 웃던 그 예쁜 얼굴을 잊을 수가 없죠.”

당시 이 감독은 이혼을 한 상태였고 첫 아내와 사이에서 낳은 세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막내 혜영은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영화배우 이혜영(54)이다. 이 감독은 스스럼없이 아이들에게 문숙을 소개했고, 문숙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혜영과 금세 친해졌다. 나중엔 함께 목욕탕에 가서 서로 때를 밀어주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군것질거리를 사 먹을 정도였다.

―아빠의 연인과 친구가 될 수도 있나요.

“모르겠어요. 그땐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어요. 이만희라는 따뜻하고 믿음직한 사람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었으니까요.”

―결혼식은 따로 하셨습니까.

“감독님과 함께 두 번째 영화인 ‘삼각의 함정’을 찍을 때일 거예요. 이 감독이 종로 2가 화신백화점 옆 보석상에서 금반지를 하나 사서 손에 끼워줬고, 함께 작은 법당에서 기도를 하고 나왔어요. 그러고 나서 함께 ‘삼포 가는 길’을 찍었죠.”

황석영 소설 ‘삼포 가는 길’을 토대로 찍은 영화 ‘삼포 가는 길’(1975)은 한국영화사에서 빛나는 작품으로 꼽힌다. 문숙은 훗날 이 영화로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받았다. 이만희 감독은 주인공 ‘백화’에게 문숙의 순수한 모습을 투영시켰다. 그렇게 영화 촬영을 마치고 녹음을 하던 그해 4월 3일, 이 감독은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다. 문숙은 그때 처음으로 이 감독이 심장질환을 앓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시나요.

“중환자실에 일주일 정도 있었어요. 난 그 병실 밖 의자에서 매일 쪽잠을 잤고요. 그러다가 면회가 돼서 딱 한 번 봤는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요. 그분은 그 일주일 동안 죽음을 경험하다 왔고, 나는 병실 밖 의자에 누워 몇 번이나 지옥을 다녀온 직후였는걸요. 그렇지만 그 순간마저도 그는 위대했어요. 피비린내가 진동했지만 누워 있지 않고 벽에 기대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다음 날 그가 눈감았다는 소식을 새벽녘 뉴스를 통해 봤고요.”

―상실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겠습니다.

“상실감, 그런 단어로도 설명 못 해요. 모든 것이 이해가 안 되죠. 이 사람이 갑자기 어디로 갔지,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난 지금 왜 아프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그 답을 찾아야만 했어요. 그래서 1977년에 미국 플로리다로 날아갔어요.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거든요. 거기서 린에린 예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그림을 그렸죠. 그림을 그린 건 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였어요. 매일 철저히 붓을 들고 나 자신과 싸웠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몸이 망가졌어요. 독한 물감을 매일같이 다뤄서인지도 모르겠어요. 온몸 구석구석이 찌르듯 아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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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기억'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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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문숙은 미국 사막 도시 산타페에 거주하며 요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여행도 시작했다. 바다를 건너고 높은 산을 넘었다. 광야를 횡단하고 사막을 가로질러 걷고 계곡을 오르내렸다.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누구도 말 걸지 않는 숲 속에서 명상을 했다. 오래된 성당들을 찾아다녔고 인디언들의 지하 예배당이라는 키바(kiva)에 누워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렇게 방황 끝에 하와이 마우이섬에 정착한 것이 2004년이라고 했다.

―자연치유, 명상, 자연식을 공부했고 그 덕에 나으셨다죠.

“요가를 하면서 나 자신의 몸을 다스리는 법을 알게 됐어요. 나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더군요. 음식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예요.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내가 달라지더군요. 채소의 뿌리나 껍질까지 먹는 마크로비오틱을 익혔고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자연치유식 요리연구원, 코네티컷에 있는 동양영양학 본원 등에서 치유식을 또 공부했어요. 한때는 저도 커피와 팬케이크를 좋아하는 도시 여자였지만, 지금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과일을 깨물어 먹고 통곡물로 식단을 꾸리며 몸을 다스리는 것에 더 익숙합니다.”

―배우 한효주씨가 하와이에 계실 때 찾아왔다던데요.

“아마도 내가 요가와 자연치유를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것 같아요. 우리 집에서 한 달 정도 함께 생활했었어요. 같이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고 자연식도 만들어 먹으며 지냈죠. 여배우는 사실 늘 남의 관심을 받는 직업이기 때문에 자신을 내려놓고 명상에 집중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런데 효주는 며칠 만에 금세 내려놓고 편안한 모습을 보이더라고요. 저도 효주씨와 있으면서 제 삶의 방식을 전파하는 법을 또 배운 것 같아요.”

―이젠 안 아프십니까.

“네, 그때 나를 괴롭히던 고통은 이제 떠나갔어요. 우물을 파듯 내 몸에 집중했더니 비로소 목을 감고 있던 끈이 느슨해지는 경험을 하게 됐어요. 명상 끝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고요. 내가 누구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는 틀을 버리면 자유로워져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을 해도 편안하죠. 이젠 비로소 자유롭습니다. 내가 이 나이에 신인의 자세로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것도 비로소 자유로워졌기에 가능한 일이에요.”

―다시 배우로 돌아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신경 쓰이지 않습니까.

“아뇨. 그림을 그리면서 배운 게 있어요. 그림은 그릴 때만 내 것이고 완성되면 내 품을 떠나가요. 남의 집에 걸린 내 작품을 몇 번 본 적 있는데, 저 그림이 내 것이었나 싶더라고요. 연기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열심히 찍을 때 그 순간만 즐기면 돼요. 결과물, 사람들의 시선, 평가는 내 것이 아니에요. 내가 책임질 일도 아니고요. 이것도 다 오랜 방황 끝에 알게 된 거죠.”

―몇 년 전 뉴욕에서 영화 ‘삼포 가는 길’을 다시 보셨다면서요.

“네, 현경 유니온신학대 교수와 함께 봤습니다. 그 영화를 다시 본 순간 깨달았어요. 내가 아직도 열쇠를 쥐고 있다는 걸요. 내게 한마디 설명도 없이 훌쩍 떠나간 그 사람에 대한 미움, 그가 그토록 아픈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란 사람에 대한 원망, 이 모든 것을 떠나보내려면 내가 열쇠를 꽂아 내 마음속 기억의 방을 열어야 하더라고요. 눈물을 흘리면서 나왔죠.”

―다시 사랑할 준비가 돼 있으신가요.

문숙은 웃었다. “제겐 늘 사랑이 있어요. 이젠 다만 좀 넓어졌죠. 사람, 우주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됐다고도 볼 수 있어요. 전 지금도 그분과 교감하고 있다고 믿어요. 그림을 그릴 땐 그 사람의 눈으로 색을 고르고, 연기를 할 땐 그 사람이 보는 눈으로 대본을 읽기도 하죠. 언젠가 그분을 만나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당신이 미처 못 살고 간 세상, 내가 있는 힘껏 열심히 즐겁게 살다 왔다’고요. 그러니 남은 삶은 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네요.”

사랑 때문에 평생을 아팠던 여배우는 이제 그 맑고도 쨍한 눈빛으로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나를 어둠 속에서 건져낸 것도 결국은 또 다른 사랑이었다고.

[송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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