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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한국판 양적완화’ 제동]“기업 부실 방치해놓고…이제와 돈 찍어 달라면 해결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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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정부 발권력 동원 주장에 “NO”

조선·해운 구조조정 재원 조달 방안을 놓고 정부·여당과 한국은행의 갈등이 본격화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수차례 언급한 ‘양적완화’ 방식에 중앙은행이 공개적으로 반발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파장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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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은 29일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내세우며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 방식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한은은 한국판 양적완화를 박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다는 점에서 공식적으로는 매우 조심스레 대응해왔지만 내부적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 기업 부실에 눈감아온 경영진·국책은행·금융당국 모두 책임은 미루면서 한은의 발권력에 기대어 부실기업의 연명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구조조정 대상 기업의 자구계획이 확실히 제시되지 않았고, 자금 지원을 통해 이들이 회생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와 새누리당이 말하는 ‘한국판 양적완화’는 한은이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에 출자하거나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자본을 확충해주는 것이다. 한계기업을 구조조정하려면 주채권은행인 산은·수은이 손실을 감당할 수 있도록 체력을 보강해놔야 한다는 논리다.

한은이 부정적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먼저 부실기업의 대주주로 있던 국책은행들이 구조조정을 방치하고 금융당국 역시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다가 한계에 몰리니 한은에 돈을 찍어 ‘수혈’해 주라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 “통화량을 늘리면 당장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내 지갑 속에 있는 현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라며 “부실 책임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도 없이 국민들에게 부담을 전가하자는 게 합당하느냐”고 말했다. 특정 부문 지원을 위해 발권력을 동원하는 사례를 한 번 만들면 추후에도 비슷한 요구가 빗발칠 수 있다는 점도 우려하고 있다. 한은은 현재 발권력을 이용한 금융중개지원대출을 통해 중소기업을 지원하고 있지만 중소기업과 대기업 지원을 같은 선상에서 볼 순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절차적 문제다. 불가피하게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절차적 정당성과 사후 책임 문제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국책은행 자본 확충은 정부 재정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실제로 정부가 구조조정 지원에 필요한 예산을 따로 편성하지 않고 한은 발권력을 쓰려는 것은 여소야대로 재편된 국회에서 예산안을 통과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더욱이 국회 논의 과정에서 재정건전성 문제가 부각되면 박 대통령이 금기시하는 ‘증세’ 논쟁을 촉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는 재정 카드를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상황이다.

발권력 활용은 국회 동의를 거치지 않고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의결만으로 결정할 수 있다. 한은 관계자는 “특정 기업에 대한 지원이 아무런 토론 과정 없이 진행되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며 “국회에서 여야 간 합의 등 최소한의 절차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은이 발권력 남용에 대해 추후 자신들에게 향할 수 있는 정치권의 책임 추궁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포석도 있다. 한은 노조는 성명서를 내고 “정부가 주장하는 건 구제금융을 돈을 찍어서 하겠다는 것으로, 양적완화가 아닌 양두구육”이라며 “국책은행 부실과 국가부채 증가는 정부 잘못 때문인데 이제 와서 국가채무 증가에 따른 비난을 피하기 위해 발권력을 동원하려는 것은 저열한 꼼수”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양적완화라는 어설픈 말장난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지 말고 국채 발행 등을 통해 순리대로 구조조정을 진행하라”고 밝혔다.

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은 “국책은행의 자본 확충이 필요하다면 그동안 구조조정을 방치해온 산은과 수은의 자산과 자회사를 먼저 팔아 돈을 마련할 생각을 해야지, 구조조정을 할 테니 한은에 돈 찍어 대라고 하는 건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이주영 기자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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