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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로힝자 명칭 쓰지 말라"…아웅산 수지도 침묵하는 미얀마의 불교 근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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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현지시간) 미얀마 양곤의 미국대사관 앞에 진홍색 법복을 입은 승려 300여명이 모여들었다. 법회를 열러 온 것이 아니었다. 각자 손에 미얀마 국가와 플랜카드를 든 이들은 불교 근본주의 단체 마바타(Ma Ba Tha·민족과 종교 수호위원회) 소속 승려들이었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이들은 근처 양곤대학에서 미 대사관까지 행진하면서, 미국이 미얀마 내 무슬림 종족을 ‘로힝자’라고 부르지 말 것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로힝자 족은 이슬람교를 믿는 미얀마 내 소수 민족이다. 약 110만명이 서부 라카인주 일대에 거주하고 있지만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선 이들을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정부는 이들이 방글라데시에서 밀입국한 불법 이민자라며 국적 대신 ‘화이트카드(임시등록증)’만 발급하고 있다. 투표권은 당연히 없다. 차별과 탄압에 지친 로힝자 사람들 중 일부는 조악한 뗏목을 타고 방글라데시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으로 피난하지만 이들 국가도 입국을 거부해 바다를 표류하는 ‘보트피플’ 신세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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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미얀마 불교 근본주의 단체 ‘마바타’ 승려들이 양곤 미대사관 앞에서 “‘로힝자’라는 명칭 대신 ‘벵갈리’를 쓰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양곤|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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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사관 앞에 승려들이 모인 전말은 이렇다. 지난 20일, 라카인주 인근 해상에서 로힝자 난민보트가 전복돼 20여명이 숨지자 미 대사관이 “로힝자 희생자들에게 조의를 표한다”고 성명을 냈다. 시위를 주도한 승려 파르마욱카는 “미 대사관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로힝자라는 용어를 쓸 때 주의를 기울였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신 이들은 방글라데시 불법 이민자라는 뜻의 ‘벵갈리’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르마욱카는 “미국이 로힝자라는 표현을 쓰려면 그들을 데려가라”고까지 했다.

미얀마에선 인구의 85%가 불교를 믿는다. 로힝자를 포함한 무슬림 인구는 전체(약 5000만명)의 4% 정도로 추정된다. 2011년 군부가 권력을 내려놓고 형식상으로나마 민정이 들어선 뒤 불교도와 무슬림 간 반목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사회가 군부의 억압에서 벗어나면서 인종·종교의 욕구가 분출돼 갈등으로 번진 것이다. 특히 2012년 라카인주에서 불교도와 로힝자 사이 유혈사태로 200여명이 숨진 뒤 반(反)무슬림 정서는 더욱 심해졌다.

미얀마 최대의 불교 근본주의 단체 마바타는 무슬림 상점 보이콧 운동 같은 각종 반무슬림 캠페인을 주도하며 종교갈등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마바타는 “미얀마 내 무슬림들의 득세를 막자”는 목적으로 조직된 불교 민족주의 단체 ‘969 운동’을 계승하고 있으며, 이 운동을 이끌었던 승려 아신 위라투는 ‘미얀마의 빈 라덴’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마바타는 정부가 불교 민족주의·근본주의적인 법안과 정책을 낼 것을 로비하는 막강한 정치집단으로 자리잡았다. ‘아이를 많이 낳는 무슬림들이 불교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는 논리가 이슬람 공포증의 근간을 이룬다. 이에 마바타는 2013년 정부를 압박해 ‘미얀마판 산아제한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불교도 여성과 무슬림 남성의 결혼을 막고, 여성들이 한 번 출산을 한 뒤 다음 출산까지 36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일부다처제와 다산의 관습을 지닌 무슬림을 겨냥한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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뗏목을 타고 미얀마를 탈출해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로힝자 난민들. Gettyimages/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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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불교 근본주의자들 앞에선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현 여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NLD)도 자유로울 수 없다. 마바타는 지난해 총선에서 군부의 지지를 받던 당시 여당 통합단결발전당(USDP)을 공개 지지했다. 수지가 영국인 남편과 아들을 두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수지와 NLD도 이들이 미얀마 불교 사회에 갖고 있는 막대한 영향력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당선된 NLD 의원 중 무슬림이 단 한 명도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권단체와 서방 국가들은 수지가 불교도들의 표를 의식해 로힝자 박해 문제에 침묵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NLD의 문민정부는 출범 당시 “소수민족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통합을 이루겠다”며 소수민족부를 신설하는 등 이전 군부정권에 비해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불교 근본주의에서 비롯한 뿌리깊은 종교 간 반목을 해결하지 않는 한 수지가 꿈꾸는 ‘국민 통합’은 요원해 보인다.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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