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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뉴스AS] 왜 개그쇼에서 권력 비판 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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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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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지난 10일 미국 개그 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에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지하철 수난’이 무대에 올랐다. 클린턴이 7일 뉴욕에서 지하철을 타려다 탑승카드 사용법을 몰라 허둥대던 모습을 묘사하고, “(역시) 택시가 가장 좋다”며 마무리한 것이다. 평소 ‘서민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클린턴이 정작 ‘서민의 발’을 사용할지 몰라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 월스트리트 금융가와 친한 클린턴의 일면을 잘 드러낸 장면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이에 클린턴도 역시 풍자로 맞받았다. 자신의 공식 누리집에 누리집 주소를 잘못 누르면 뜨는 오류 페이지를 만들고, 이 영상을 움직이는 사진으로 만들어 올렸다. 즉, 누리집 주소를 잘못 입력해 오류 페이지가 뜨면, 클린턴이 탑승카드를 잘못 긁는 영상이 반복되고 ‘이 페이지로 가시면 안됩니다(Trying to get where you want to go? This page is not)’라는 메시지가 뜨는 것이다. 이어 자원봉사 지원 화면으로 안내한다.





#장면2.

지난 3일 <티브이엔>(tvN)에서 방영된 개그 쇼 <코미디 빅리그>의 ‘충청도의 힘’ 코너는 ‘한부모 가정 비하’ 논란으로 누리꾼들의 뭇매를 맞았다. 극중 부모가 이혼해서 따로 사는 6살 아이에게 장동민은 “너는 얼마나 좋냐. 생일 때 선물을 양쪽에서 받잖아. 이게 재테크여”라고 한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다른 여자랑 두 집 살림 차렸다고 소문이 아주 흉흉하게 다 돌고 있어” 등의 조롱도 이어졌다. 한부모 가정에 대한 비하성 발언으로 누리꾼들의 거센 비판이 일었다. 장동민은 <코미디 빅리그>에서 하차했고, 이 코너도 폐지됐다.



비슷한 시기 개그 쇼에서 볼 수 있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한쪽에서 개그가 권력을 겨냥할 동안, 다른 한쪽에선 사회적 약자를 조롱한다. 시기를 넓히면 차이는 더 커진다. 힐러리 클린턴, 도널드 트럼프 등 미국의 유력 대선 주자들은 지난해 말부터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잇따라 출연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코미디 센트럴>의 개그 쇼 <데일리 쇼>에 모두 7번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 개그 프로그램에서 이런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다문화 가정, 여성, 장애인, 노인 등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개그가 빈번하다. 지난해 한국방송(KBS) <개그콘서트>의 ‘사둥이는 아빠 딸’ 코너에서는 한 여자아이가 “난 김치 먹는 데 성공해서 김치녀가 될 거야”라고 말했다. ‘김치녀’는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이 코너도 논란 끝에 폐지됐다. 문강형준 평론가는 이같은 현상을 두고 “주변화된 이들을 희화화하는 <개그콘서트>의 웃음과 약자를 혐오하는 ‘일베’의 웃음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 [크리틱] ‘갑질’의 저편) 위를 비꼬는 개그와 아래를 조롱하는 개그, 이 차이는 어디서 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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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놀리는 ‘쉬운 개그’ 고질적 관습

기본적으로 약자를 놀리는 ‘쉬운 개그’를 추구하는 한국 개그의 관습이 고질적인 탓이 크다. 이주 노동자는 ‘시꺼멓고’ 한국말이 서툴다고 놀리고, 뚱뚱한 사람은 게으르고 둔탁해 보인다고 헐뜯는다. 여성의 외모가 개그의 기본 소재가 되기도 한다. 사회의 오랜 편견에 쉽게 편승하는 개그다. 꼬집고 뒤틀기 위해 몇 차례 연상을 거듭할 필요도 없고, 놀림의 대상이 반발해 올까봐 염려할 이유도 없다. 다수가 아닌 이들을 조롱하면서 다수의 즉각적인 웃음을 자아내니 효과도 좋다.

하지만 강자 풍자가 불가능한 현실도 개그 소재 위축에 한몫을 담당했다. 근래 국내에서도 강자를 비꼬고 기득권을 뒤트는 개그가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정치, 시사 풍자 개그가 잇따라 철퇴를 맞았다. 지난해 메르스 사태 당시 정부의 미숙한 대응을 꼬집은 문화방송(MBC)의 <무한도전>과 한국방송(KBS)의 <개그콘서트>가 잇달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통심의위) 제재를 받은 것이 단적인 예다. <무한도전>에서는 보건 당국이 메르스 예방을 위해서는 “낙타, 염소, 박쥐와 같은 동물 접촉을 피하고 낙타고기나 생낙타유를 먹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안내한 것을 비꼬았다. 방통심의위는 “‘중동 지역’ 낙타임을 고지하지 않았다”며 행정지도 조치를 내렸다. 이 조치를 두고 누리꾼들은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낙타가 있었느냐”고 비꼬았다.

■ “통렬함은 가진자에 대한 공격에서 나온다”

지상파 개그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한 개그맨은 “코미디의 풍자는 위를 향해야 하는데, 지금은 위를 향할 수 없으니 아래를 보는 것 같다. 통렬함은 가진자에 대한 공격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제작진이 힘없는 사람들이 상처받을까를 고민하기보다는 힘 있는 사람들이 언짢지 않을까를 더 신경쓰게 되면서, 진짜 비하 개그를 못 하니 다른 쪽을 겨냥한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관련기사 : 약자 비하 개그, 어디까지 가려 하니)

사정이 이렇다 보니 권력자들을 향해 신랄한 정치 풍자를 이어가던 옛 코미디언들이 그립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김형곤은 KBS <유머1번지>의 ‘탱자 가라사대’, ‘회장님, 우리 회장님’ 등의 코너에서 재계, 정계, 법조계 등 사회 권력을 고루 풍자했다.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을 빗대 “테이블을 ‘탁’하고 치니, 도자기가 ‘퍽’하고 깨졌다”라고 패러디했고, 재벌가를 겨냥해 “나는 회장님의 영원한 종입니다. 딸랑딸랑”이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다. 민주화가 막 시작된 직후라 여전히 엄혹한 시대의 잔재가 남아 있었지만, 정치 풍자는 어느 때보다 냉철하고 신랄했다. 이런 개그를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걸까.

‘회장님, 우리 회장님’ 영상



‘탱자 가라사대’ 영상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그래픽 정희영 기자 hee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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