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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학계 경고 무시한 졸속행정…‘국보’가 사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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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반구대 암각화 ‘키네틱댐 모형’ 2차 실험 결국 연기

정부와 울산시가 학계 전문가들의 반대 속에 지난 3년여간 추진해온 ‘울산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58호) 보존대책이 결국 원점으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이 담겼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경(고래잡이) 유적으로 국제적 주목을 받는 문화유산이다.

2013년 이후 반구대 암각화 보존책으로 추진된 가변형 임시 물막이(키네틱댐)의 2차 모형실험이 졸속 논란 끝에 연기됐다. 당초 2차 실험은 28일 경기 광주에서 검증평가단 입회 아래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실험주관 업체인 포스코A&C가 실험을 하루 앞둔 27일 구조물을 무단 철거하면서 진행되지 못했다. 포스코A&C는 2차 실험에 대비해 지난 25~26일 비공개 사전 실험을 치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2차 실험은 이르면 다음달 초 다시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마저 실패한다면 키네틱댐 방안은 철회될 수밖에 없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전문가들의 반대 속에 지난 3년간 투입된 시간과 국민 세금 28억여원 등이 날아가는 것이다. 물론 반구대 암각화는 침수와 노출을 반복하며 여전히 훼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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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 보존방안으로 추진 중인 가변형 임시 물막이(키네틱 댐)의 개념도.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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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거듭한 실험

지난해 12월 치러진 키네틱댐 1차 모형실험은 투명판 접합부와 구조물 바닥에서 물이 새어나와 실패했다.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설계부터 다시 해 치러진 비공개 사전실험 역시 같은 현상으로 실패했다. 모형실험에는 투명판 4개만을 이용했지만, 실제 반구대 암각화에 설치될 키네틱댐은 투명판 160개를 이어 붙여야 한다. 모형실험이 성공해도 실제 키네틱댐의 안전성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데, 모형실험부터 연달아 실패만 한 것이다. 키네틱댐 아이디어를 최초 입안한 함인선 포스코A&C 수석기술고문은 27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물막이 투명판을 잇는 접합부에서 자꾸 물이 새고 있다”며 “1주일 정도 시간을 더 들여 접합부 밀봉 응고가 완벽해지면 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 전망은 부정적이다. 입안 당시부터 실패는 예견된 일이었다는 것이다. 반구대암각화보존연구소 자문위원인 이수곤 서울시립대 교수는 키네틱댐안을 “공학적으로 불가능한 계획”이라며 “만화 같은 소리”라고 비판했다. 키네틱댐 기술평가단 일원인 조홍제 울산대 교수도 “실험이 계속 실패하니까 연기한 것 같은데 (성공 가능성이 없어) 어차피 할 필요가 없는 실험”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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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는 인물 형상과 고래, 호랑이 등 도상 300여점이 새겨져 있다. 수천년 전 선사시대 생활문화상 연구와 예술적 가치로 국제적으로도 주목받는 문화재이다 문화재청 제공


■전문가 반대에도 성사된 보존책

반구대 암각화 훼손 상황은 200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문화재청은 2009년 암각화의 풍화단계가 6단계 중 5단계인 ‘흙상태 진입 직전’이라고 평가했다. 바위에 새겨진 300여점의 각종 암각화가 희미해져 사라질 위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존방안은 관계 기관들 사이에서 표류했다. 문화재청과 학계 전문가들은 암각화를 침수하게 만드는 사연댐의 수위를 낮추는 게 근본적 방안이라고 주장했고, 울산시는 식수원 문제를 들며 생태제방안을 제시해 팽팽히 맞섰다.

이 와중에 함 고문이 2013년 “우선 투명 막으로 물을 막고, 물 문제가 해결된 뒤 해체하면 된다”며 키네틱댐안을 제안했다. 함 고문은 자신의 수업을 듣는 대학원생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이후 논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해 5월 황우여 당시 새누리당 대표 등은 울산 암각화 현장을 찾아 “반구대 암각화가 물속에 잠기지 않게 하는 게 시급하다”며 “우선 임시 제방을 쌓고 그 후 근본적인 방안을 마련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6월 초에는 정홍원 국무총리가 현장을 찾았다. 그리고 6월16일 정 총리가 참가한 가운데 국무조정실과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울산시는 전격적으로 키네틱댐 설치 추진에 합의한다는 내용의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한 대학원생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안이 공론화 한 달여 만에 정부 정책 합의로 이어진 것이다.

다수의 전문가들이 당시 키네틱댐안의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임시방편인 데다 과학적으로도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 때문이다. 조홍제 교수는 “당시 여러 문제가 제기돼 키네틱댐안이 당연히 안될 줄 알았는데 MOU가 체결됐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애초 계산부터 턱없이 잘못된 방안이었다. 토목을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실험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키네틱댐이 대안으로 전격 받아들여진 것과 관련, 정부 한 관계자는 “청와대에서 계속 대안을 요구하는데, 문화재청과 울산시는 평행선만 달리고 있었다. 뭐든 대안이 필요한 상황에서 키네틱댐이라는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전했다. 사실 암각화 보존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고, 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그해 4월 “그것(반구대 암각화)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며 “방법을 연구해 달라”고 주문했다.

■책임 소재와 향후 대책은

지금까지의 실험 결과와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2차 실험도 성공하면 좋겠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2차 실험이 실패하면 계획 전체가 백지화되고, 설계와 실험 등에 투입된 예산 28억원이 사라진다. 여기에 키네틱댐 계획에 매달리느라 암각화 보존을 위한 3년이란 시간도 허비했다. 문화재청은 키네틱댐 계획이 철회되면 사연댐 수위조절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울산시는 식수원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고 말한다. 암각화 보존책이 3년 동안 예산과 시간만 낭비하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지금도 1년 중 절반 이상 물에 잠겼다가 다시 노출되면서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가 흙이 되기 전에 정부의 대안 마련이 시급한 것이다.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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