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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Why] 빨리빨리 문화 때문에… 사라지는 카드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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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서명 일상화

서명 비교하지 않고 종업원이 대신 하기 일쑤…서명 요구했다가 싸움도

사고 나면 카드사가 부담

가맹점 고의성 없고 카드에 서명만 있으면 카드사가 피해액 보상

조선일보

서울 마포구에 사는 주부 이담미(28)씨는 지난달 홍익대 근처 한 일식점에서 식사를 마친 뒤 계산대 앞에서 신용카드를 건넸다. 카드를 받은 점원은 전자식 서명 패드에 '서명하세요'라는 문구가 뜨자마자 카드 모서리를 패드에 일(一)자로 긁어 대신 사인했다. 이씨는 "아무리 바쁘다 해도 점원이 내 사인을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싶어 찜찜했다"고 말했다.

신용카드 회원 본인이 직접 해야 하는 카드 전표 서명을 다른 사람이 대신 하거나 카드 사용자가 회원 본인임을 확인하는 절차가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 바쁘다는 이유로 점원이 아무렇게나 사인을 하는 경우도 많아 카드 사용자들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외국에서 카드로 결제할 때 서명 대조는 물론 신분증 제시까지 요구받은 적 있는 사람들은 "이래도 되는 거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카드 결제 시 사인을 해야 하는 것은 카드를 쓰는 사람과 명의자가 같은지를 확인할 법적 의무가 카드 가맹점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무는 여신전문금융업법 제19조 제2항에 명시돼 있다. 고객이 서명을 하면 점주는 그때마다 신용카드 뒷면의 사인과 실제 사인이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대부분 이런 확인 절차가 생략된다. 점원이 대신 서명한다는 것은 이런 법규를 깡그리 무시한다는 뜻이다.

청주에서 25년째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권모(54)씨는 "원칙대로 본인 확인을 하려 하면 손님이 귀찮아한다"며 "카드 결제하려는 손님이 나이 어린 학생으로 보이거나 행동이 수상쩍은 경우를 제외하곤 제대로 서명을 비교한 적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가맹점이 서명 확인을 허술하게 하는 건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관련법에 따르면 신용카드 회원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무단으로 카드를 쓴 경우 가맹점은 '고의'나 '중과실'이 없는 한 그에 대한 책임이 없다. 여기서 '고의'란 본인이 아니라는 걸 가맹점이 알면서도 결제한 경우를 말하고, '중과실'이란 카드 뒷면에 아예 서명이 없거나 카드상 사인과 실제 사인이 한눈에도 확연히 다를 경우 등을 가리킨다. A카드사 관계자는 "가맹점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경찰 조사로 가맹점이 '카드깡(카드를 이용한 불법 할인 대출)'의 공범으로 밝혀지는 등 그 책임이 분명한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 카드사가 피해액을 부담한다"고 말했다.

개인 회원 역시 카드 뒷면에 사인만 제대로 해 놓으면 거의 책임을 면할 수 있다. 여신금융협회 관계자는 "카드 분실·도난 시 카드상 서명이 없으면 피해액의 최고 50%를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면서도 "단순히 실제 사인이 카드상 사인과 다르다는 점만으로는 개인 회원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단으로 사용한 금액이 몇 만원 수준이면 고객이 카드사에 전화로 "카드 뒷면에 서명이 돼 있다"고만 주장해도 피해 금액을 바로 보상받을 수 있다.

카드사가 서명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에 대한 피해를 떠안는 것으로 보이는데도 정작 카드사들은 한발 더 나아가 '무서명 거래'를 확대하고 있다. 무서명 거래란 5만원 이하 금액을 서명 없이 결제하는 것으로 지난 2007년 도입됐다. 무서명 거래 시 카드 무단 사용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카드사에 있다. B카드사 관계자는 "어차피 본인 확인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 서명 건당 35원씩 결제 대행업체 대리점에 주는 수수료라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결제 대행업체 대리점주들은 이에 대해 "협의 없이 진행하면 우리가 전국 카드 가맹점에 임대해 준 서명 패드를 (계약기간 만료 시) 다 떼어 버리겠다"며 맞서고 있다.

무서명 거래의 '5만원 이하' 조건은 금융위원회가 의결한 규정임에도 택시 안에서는 무시될 때도 많다. 서울에서 10년째 개인택시를 모는 조모(61)씨는 "이전에는 영수증 아랫부분에 볼펜으로 꼬박꼬박 사인을 받다가 택시에서 무서명 결제가 가능해지고 난 다음부터는 30만원 넘는 금액도 사인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울시택시운송사업조합 관계자는 "한시가 급한 손님이나 취객에게 서명을 요구하면 십중팔구 다툼이 벌어진다"며 "편의상 서명 없이 결제하고 그에 대한 책임은 택시회사, 기사, 결제 대행업체가 분담한다"고 말했다.

이재연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카드 결제 시 서명을 꼼꼼히 비교하고 추가로 신분증을 요구하거나 아예 4자리 이상의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인데, 우리나라는 거꾸로 서명마저 없애고 있는 실정"이라며 "수초를 아끼는 편리만을 좇다 보면 허술한 보안 때문에 발생하는 카드사의 비용이 장기적으로 고객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권순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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