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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짐 싸려는데 돌연 철수 통보…옷 60억원어치 그냥 두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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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기업인이 말하는 ‘철수 상황’

중앙일보

개성공단에서 완제품을 챙겨 내려온 한 근로자가 11일 자유로에서 짐을 옮기고 있다. [사진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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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9시50분 경기도 파주시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CIQ).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출입사무소를 향해 북쪽 땅에서 수십 개의 차량 불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북한이 이날 오후 ‘개성공단 폐쇄 및 남측 인원 전원 추방’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뒤 현지에 잔류해 있던 남측 인원 280명의 ‘귀환 행렬’이었다.

공단 문을 닫고 군사통제구역으로 두겠다는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성명 발표(오후 4시50분) 후 약 6시간 만인 이날 오후 11시5분 철수가 완료됐다.

출입사무소를 빠져나오는 공단 입주업체 임직원들은 한결같이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신발 제조업체 현지 법인장 강성호(62)씨는 “오후에 갑작스럽게 철수 통보를 받고 짐도 제대로 못 챙기고 나왔다. 정말 참담하다”고 고개를 떨궜다. “공단에 완제품이 산처럼 쌓여 있는데 그걸 두고 나오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재고 정리를 해 봐야겠지만 피해 금액이 수십억원은 될 것”이라고도 했다.

섬유업체 법인장 김성식(59)씨는 취재진과의 인터뷰 중 끝내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고생스럽게 만든 완성품을 빼오기 위해 짐을 싸려고 준비하는데 갑자기 철수하라는 연락을 받아 정신없이 나오게 됐다. 너무나 아쉽다”고 말하면서다.

또 다른 입주 기업 법인장 김현수(58)씨는 “오후 5시쯤 철수 통보를 받았는데 전체 인원 집합이 늦어져 시간이 걸렸다”며 “갑자기 나오는 바람에 입던 옷도 다 챙기지 못했다”고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북한 조평통의 성명 발표 직후인 오후 5시와 5시30분에 귀환한 근로자들은 북한의 발표 내용조차 모르고 있었다. 오후 5시쯤 출입사무소를 빠져나온 공단 입주 기업의 한 직원은 “북한이 남측 인원을 모두 추방한다는 얘기나 설비·제품 등 자산을 동결하겠다는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전원 추방’ 발표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날 남측으로 내려온 공단 근로자들은 대부분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현지 분위기가 어떠냐”는 물음에도 극도로 말을 아꼈다.

▶관련기사 북한 "개성공단 전면 중단은 선전포고" (전문)

상당수가 사무소를 빠져나오자마자 “전화부터 좀 합시다”라며 휴대전화를 꺼내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가족 등 지인들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거나, 소속 회사에 귀환 소식과 물자 반출 상황을 알리는 통화였다.

공단에서 철수하는 남측 근로자들의 승합차에는 완제품과 회사 물품 등이 차량 좌석과 트렁크는 물론 지붕 위까지 가득 쌓였다. 차량 지붕 위 물품들은 떨어지지 않도록 끈이나 테이프로 감아 고정시켰다.

이 차량들이 출입사무소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파주 통일대교에 도착하면,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형 봉고차나 트럭에 짐을 다시 옮겨 싣는 장면이 연속됐다.

공단에 액화석유가스(LPG)를 공급하는 업체에서 현지 영업소 부장으로 일하는 김학주(63)씨는 이날 오전 “신변에 대한 우려보다 지난달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부터 바이어들의 주문이 줄어드는 것이 걱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막대한 시설 투자를 해놨는데 앞으로 누가 이런 리스크를 안고 투자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존폐 기로에 선 입주 기업들은 이날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속옷을 생산하는 업체 관계자는 “설 연휴 직후라 더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한 의류업체 관계자는 “통상 두 달치 원단을 개성공단에 넣어두고 있는데 재고와 설비 수거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김형구·곽재민 기자, 파주 도라산 CIQ=송승환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

사진=전민규 기자

김형구.곽재민.송승환.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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