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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농담과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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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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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김 선생은 우스갯소리를 잘했다. 한번은 친구의 집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주인이 술상을 차렸는데 안주가 푸성귀밖에 없었다. 주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도 가난하고 시장도 멀어서 맛있는 건 조금도 없고 그저 푸성귀나 있으니 부끄럽네.” 이때 마침 닭들이 마당에서 어지러이 모이를 쪼고 있었다. 이를 본 김 선생이 말했다. “대장부는 천금을 아끼지 않는다 하였으니 마땅히 내 말의 목을 베어 술안주로 삼으리라(大丈夫不惜千金 當斬吾馬佐酒).”

모처럼 친구가 놀러 왔는데 술안주가 시원치 않아 민망해하는 주인에게 손님이 호기롭게 외칩니다. “까짓것, 내 말을 잡아 안주 합시다.” 주인도 놀랐겠지만 옆에서 조용히 먹이를 씹고 있던 말은 기절초풍할 노릇입니다. “왜, 왜 나야? 기껏 여기까지 잘 태워다 주었더니.”

주인이 물었다. “말의 목을 베면 무엇을 타고 돌아가려는가?” 김 선생이 말했다. “저기 저 마당에 있는 닭을 빌려서 타고 돌아가리다.” 그러자 주인이 껄껄 웃고는 닭을 잡아 안주로 먹게 하였다(殺鷄餉之).

조선 초기의 학자 서거정(徐居正·1420∼1488) 선생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웃긴 웃지만 뭔가 아슬아슬합니다. 만약 김 선생이 “아니 이 친구야. 마당에 닭이 이렇게 많은데 자네는 그래 ‘집이 가난하네, 시장이 머네’ 하면서 이렇게 빈약한 안주를 내놓는단 말인가? 잔소리 말고 닭 한 마리 잡게” 했다면 분위기가 어찌 되었을까요? 닭은 먹었을지 모르지만, 주인의 마음이 퍽 불편해지거나 어쩌면 둘의 우정이 깨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손님의 은근한 농담과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 에둘러친 주인의 여유가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정치에 여유가 없어졌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사실은 정치뿐만 아니라 우리네 일상이 다 그렇게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살기가 팍팍해졌다는 뜻이겠지요. 이럴 때일수록 농담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물론 농담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여유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게다가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또 선의로 하는 농담이라면 썰렁하더라도 웃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농담의 전제조건은 무엇보다도 ‘상대에 대한 배려’입니다.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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