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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증조부·부모·삼촌에게 세배 땐 '문하배 원칙'…옆방서 절 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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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진 수요일] 설날 퇴계 선생 종갓집 며느리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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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2030세대에게 명절은 기피 대상이 됐습니다. 취업이며 결혼이며 어른들의 잔소리가 쏟아질 게 뻔하니까요. 하지만 우리 전통을 계승해야 할 청춘 세대가 명절을 기피하는 현실은 걱정스럽습니다. 해서 우리는 청춘의 시각에서 명절의 예를 전통 그대로 배워보기로 했습니다. 설날이었던 지난 8일 청춘리포트팀의 막내 기자가 ‘종갓집 며느리’ 1일 체험을 다녀왔습니다

정강현 청춘리포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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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자손들은 설날마다 경북 안동시의 종택에서 차례를 지내 왔다. 사진 왼쪽 위부터 차기 종손 이치억씨, 본지 백수진 기자, 종손 이근필 옹, 둘째 손자 이형석군, 맏손자 이이석군. [프리랜서 공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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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오전 6시30분 경북 안동시 도산면 퇴계 이황 종택. 설날 아침이었지만 종갓집은 차분했다. 부엌에서 떡만둣국 끓이는 소리마저 없었다면 고요하다고 할 정도였다. 일가친척 수십 명이 모여 새벽부터 왁자지껄 분주하게 차례를 준비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다른 집에 가야 더 명절 같은 분위기를 느낄 텐데….” 차례 음식을 준비하던 차기 종부(宗婦) 이주현(38)씨의 말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부모와 함께 서울로 옮겨 간 이가 많아 명절에 종택을 찾는 사람이 최근 줄었기 때문이다. 5~6년 전만 해도 설 때면 100여 명이 이곳을 찾았지만 요즘엔 20여 명 안팎이다.

그러나 규모가 줄었다 해도 이곳은 500여 년간 우리 전통을 고스란히 지켜온 종갓집이다. 지붕 위에 놓인 푸른 기와 한 장, 담벼락을 이루고 있는 돌멩이 하나에도 수백 년을 지내온 예와 전통이 쌓여 있는 장소란 얘기다. “사람이 줄었다고 해도 종가에서 할 일은 해야죠.” 차기 종손인 이치억(41)씨의 설명에는 아쉬움과 자부심이 교차했다.

친·외가가 모두 수도권에 있고 그 흔한 시골 한 번 가본 적이 없어 ‘조율이시’ ‘좌포우혜’가 뭔지도 잘 모르는 27세 막내 기자가 이곳 종갓집을 찾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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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0 설날 아침은 사당에 문안 인사 올리며 시작


오전 7시 종갓집의 설날 아침은 조상님께 드리는 문안 인사로 시작됐다. 하얀 두루마기 차림의 16대 종손 이근필(84)옹이 큰 사랑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옹은 오른쪽 곁문으로 나가 돌계단을 오른 뒤 조심스레 사당으로 향했다. 단정하게 한복을 갖춰 입은 동생 이정희(70)씨, 이치억씨, 손자 이이석(9)군과 함께였다.

사당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 문은 차례와 제사가 진행될 때만 잠깐 열린다. 사당 안에는 퇴계 선생과 종손의 고조부부터 부친까지 4대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조상님 지난 한 해 감사했습니다.” 닫힌 사당 문 앞에서 3대가 엄숙하게 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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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0 윗사람에게 세배 올릴 땐 문 밖에서


조상께 세배를 올리고 나면 가족 간에 인사를 주고받을 차례다. 원칙은 ‘문하배(門下拜)’다. 증조부·부모·삼촌에게 세배할 때면 문 밖에서 절을 올리는 방식이다. 늘 어른들 면전에서 세배를 올려온 기자에게는 생소한 풍경이었다.

큰 사랑채에 이옹이 앉자 문으로 이어진 옆방에 자리 잡은 자손들이 차례차례 세배를 올렸다. 이옹은 손자 이군에게 덕담을 건넸다. “항상 건강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한자 공부 열심히 해서 올해는 5·6급 자격증을 따려무나.” 부엌에서 아침 준비로 분주히 일하던 제수 김숙희(63)씨 등도 방을 찾아 세배를 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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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0 좁은 부엌서 온 가족이 함께 아침 식사


오전 8시 차례 준비에 앞서 온 가족이 모여 아침 식사를 했다. 평소 종택에는 이옹이 혼자 지낸다. 이옹이 종손이 되기도 전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 종부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종갓집도 명절 때나 일가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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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0 한 달 만에 문 연 사당을 꼼꼼히 청소


아침 식사가 끝나자 사당 청소를 하기 위해 다시 돌계단을 올랐다. 지난 1월에 제사를 지낸 뒤 굳게 닫혀 있던 공간이다. 한 달 새 먼지가 꽤 쌓여 있었고 구석엔 박쥐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바닥을 쓸고 행주로 신주를 모신 감실을 꼼꼼하게 닦았다. 행주를 빨아가며 세 차례 정도 닦고 나자 청소가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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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 과일과 전, 떡만둣국 등 차례 음식 준비


오전 9시가 되자 본격적인 차례상 준비가 시작됐다. 배·사과·감·한라봉·대추 등 과일과 북어포·고기전·생선전이 준비됐다. 닭고기가 올라가는 자리는 계란말이가 대신했다. 전을 찍어 먹을 간장과 물김치, 떡만둣국까지 차려지자 준비가 끝났다. 생각 외로 단출하다는 느낌이었다.

이치억씨는 “선조의 가르침에 따라 설 차례상뿐 아니라 선조의 기일에 올리는 연중 제사들의 제사상도 요란하지 않게 차린다”며 “제사 음식은 본래 살아 있는 사람의 밥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퇴계 선생은 유언으로 제사를 검소하게 지낼 것을 당부했다.

이씨는 “퇴계 선생께서 제사에 유밀과(기름에 튀기고 벌꿀을 묻힌 과자)를 쓰지 말라고 하셨다”며 “상차림에 꼭 필요하지 않은 고급 음식은 올리지 말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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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손님 기다리는 동안 어르신의 덕담 경청


오전 11시 차례상은 대략 준비가 끝났지만 친척들이 모두 모일 때를 기다려야 했다. 이옹 옆에 앉아 덕담을 듣는 동안 손님들이 찾아왔다. 근처에 있는 진성 이씨 종가는 퇴계 선생의 조부부터 내려오는 큰 종가, 퇴계 선생의 손자 대부터 내려오는 작은 종가 등 여러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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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사당 안 6개 상에 음식을 차리고 차례 시작


차례는 오전 10·12시 등 종가마다 시간을 달리해서 지낸다고 한다. 제관(祭官)들이 여러 종가의 차례에 모두 참석하기 때문이다. 오전 11시30분쯤 되자 제관들이 모두 종택에 도착했고 비로소 사당 문이 열렸다.

여자는 제사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차례 음식을 부엌에서 옮기는 일부터는 남자들의 몫이다.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쓴 자손들이 음식이 차려진 상을 날랐다.

사당에는 상이 모두 6개 있다. 맨 왼쪽의 가장 큰 상은 퇴계 이황 선생의 자리다. 그 옆으로 종손의 고조부부터 차례로 내려온다. 사당 오른쪽 한 귀퉁이에 마련된 작은 상은 일찍 세상을 떠난 종손의 부인을 기리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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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전통 복장을 하고 퇴계 선생께 절을 올림


차례를 올리고 잠시 휴식을 취한 부엌은 곧 점심 식사 준비로 바빠졌다. 제사를 마치고 들어오는 음식들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손님상으로 다시 차리는 과정은 차례 준비보다도 더 복잡했다. ‘추월한수정’이라 불리는 손님맞이용 공간에서 남자들이 식사하는 동안 여자들은 부엌의 작은 상에서 식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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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차례상에 오른 음식으로 점심 식사 준비


이옹은 “제사를 아무리 잘 차려도 조상님들은 한 술도 뜨지 못한다”고 말했다. 제사 음식을 넘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옹은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으면 족한다”고 기준을 제시했다. 분수에 넘치는 제사상은 “본심이 아니라 과시”라는 생각에서다. 점심 식사가 마무리되는 오후 2시가 되자 종택에 모였던 일가친척들은 다시 각자의 집으로 흩어져 일상으로 돌아갔다.

겸손과 배려, 그리고 검소함. 퇴계 선생의 가르침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손들의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8시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훌륭한 선조가 자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 가치를 끊임없이 되새기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말이다.

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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