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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단독]'딱한 사정'에 판사·검사·변호인 한마음…40대男, 명절 앞두고 재판 하루 만에 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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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조선DB


“열 밤 자면 온다고 했는데 언제 와요? 추석 전에는 볼 수 있나요?”

법정에 나온 A씨(42) 여자친구가 물었다. A씨 변호를 맡은 대한법률구조공단 공익법무관은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든 재판을 빨리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A씨는 작년 4월 경찰의 음주 측정 요구를 거부한 혐의로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됐다. 얼굴이 불콰한 A씨가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음주운전을 했다고 판단한 경찰관이 세 차례 음주측정을 요구했는데, A씨가 거부했다는 것이다. 검찰이 약식기소를 하면, 법원은 서류만 보고 벌금형을 결정한다. 하지만 사건 기록만으로 형을 정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법원은 이 사건을 정식재판에 회부했다. 법원은 공소장 등 소송 서류를 세 차례나 A씨 주소지로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법원은 경찰에 의뢰해 A씨 소재 파악에 나섰다. 당시 A씨는 다른 지역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작년 3월 머리를 다쳐 귀가 잘 안 들렸기 때문이다. 뒤늦게 A씨 소재를 파악한 검찰은 작년 9월 7일 A씨를 구속했다.

A씨와 상담한 공익법무관은 A씨가 왜 음주 측정을 거부했는지 알게 됐다. A씨는 지적장애를 앓는 여성과 같이 살고 있었는데, 추석 이후 결혼할 생각이었다. A씨 가족은 강하게 반대했다. 사건 당일에도 A씨는 가족과 한바탕하고 여자친구를 직장에 데려다 줬다. 기분이 상한 A씨는 술을 마셨고, 길가에 차를 세워둔 채 잠이 들었다가 경찰관에게 적발됐다. 귀가 좋지 않았던 A씨는 경찰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경찰관이 조금 심하게 대하자, 마음이 언짢았던 A씨가 음주측정을 거부한 것이다.

공익법무관은 이런 사정을 담아 재판을 빨리 진행해 달라는 의견서를 재판부에 냈다. 몸이 불편한 A씨가 교도소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도 주장했다. 추석 연휴를 나흘 앞둔 작년 9월 22일 오전 A씨에 대한 첫 재판이 열렸다. A씨는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그런데 검찰이 증거목록 일부를 빠뜨렸다. 보통 이 경우 재판을 한 번 더 열게 되고, A씨는 교도소에서 추석을 보내야 한다.

공익법무관은 재판부에 “빨리 재판을 진행해 A씨를 추석 전에 풀어줘야 한다”고 한 번 더 요청했다. 재판부는 검찰 측 의견을 들어, 오후에 재판을 한 번 더 열기로 했다. 검찰도 증거 목록을 제출하기로 했다. 공익법무관은 오후에 열린 재판에서 A씨와 A 여자친구 상황, 경제적 어려움 등을 이유로 신속 선고를 또 요청하며 최종 변론을 마무리했다. 재판부도 A씨 상황을 감안해, 교도관의 양해를 구한 다음 30분 후 바로 선고하기로 했다. 통상 선고는 최종 변론 이후 1~2주 후에 이뤄진다. 교도관들도 교도소로 돌아가는 시간을 늦추고 선고를 기다렸다. 재판부는 A씨에게 벌금 250만원을 선고했고, A씨는 이날 풀려났다. 검찰도 항소를 안 해 형이 그대로 확정됐다.

법률구조공단 관계자는 “하루만에 재판 시작부터 선고까지 이뤄져 A씨가 추석 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검찰 구형 벌금액의 절반만 선고받아 경제적 부담도 덜었다”며 “법원·검찰·변호인·교도관 등 모두가 A씨의 딱한 사정에 공감해 신속한 진행을 도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송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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