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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취재X파일] “진작 올 걸…” 북촌의 유일한 영화 쉼터 문 닫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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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이혜미 기자] 2015년 11월 30일, 서울 북촌 거리가 여느 평일 저녁보다 술렁입니다. 옷깃을 여민 젊은이들이 아트선재센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이날은 북촌에 위치한 예술영화전용관 ‘씨네코드 선재’가 작별을 고하는 날이었습니다. 관객들을 위해 준비한 마지막 선물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마스터’. 수업을 마친 학생들, 퇴근한 직장인들이 종종걸음으로 극장 앞에 모여듭니다. 씨네코드 선재를 운영해 온 영화사 진진의 직원들도 현장에 나와 직접 관객들을 맞이합니다.

영화 상영까지 40여 분이나 남았는데, 일찌감치 티켓을 끊은 몇몇 관객들은 극장의 마지막 풍경을 눈에 담으려는 듯 바삐 움직입니다. 폐관 소식을 전하는 공지 글을 가만히 읽어내려가는 뒷모습, 휴대전화 카메라로 극장 구석구석을 찍는 이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영화 시작 시간이 가까워오자 매표소 앞엔 이내 긴 행렬이 늘어섭니다. 홀로 극장을 찾은 여성 관객들이 가장 많았고, 연인 혹은 친구와 함께인 이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는 각자 티켓을 2장 씩 끊어오는 바람에 난감해 하다가, 한 여성 관객에게 티켓을 양도한 뒤 한숨을 돌립니다.

이날 씨네코드 선재에서 만난 관객들은 하나같이 “그동안 자주 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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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30대 여성 관객은 “엊그제 폐관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서 찾아왔다”면서 “서울아트시네마도 다른 데로 옮겼던데, 요즘 예술영화관들이 힘든 것 같다. 왜 진작에 (영화를) 보러오지 않았을까 하는 부채감이 있다”고 아쉬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퇴근 후 곧장 극장을 찾아왔다는 서시원(24ㆍ 남) 씨는 “인디스페이스와 광화문 스폰지하우스만 가다가 ‘(씨네코드 선재에) 언젠가 한 번 오겠지’ 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다”며 “극장 오는 길이 너무 예쁘더라. 진작에 와볼 걸 싶고, 많이 아쉽다. 그래도 마지막 영화가 ‘마스터’인 게 위안이 된다”며 멋쩍게 웃었습니다.

지난 2008년 9월, 문을 연 씨네코드 선재는 멀티플렉스 극장에선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해 왔습니다.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부터, 한국영화계를 이끌어나갈 젊은 감독들의 독립영화, 독창성이 돋보이는 이색 기획전으로 영화 마니아들을 모았습니다. 적자에 허덕이면서도 극장을 운영해 왔지만, 최근 건물주인 아트선재센터 측의 건물 리모델링 문제로 임대차 계약이 종료되면서 결국 간판을 내리게 됐습니다. 앞서 영화사 진진은 폐관 소식을 전하며 “그동안 크고 작은 발걸음으로 극장을 찾아주신 모든 관객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고 작별 인사를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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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인디 뮤지션이 자신의 SNS에 ‘월세를 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 같다’는 요지의 글을 남겨 화제가 됐죠. 월세를 내고 나면 홀쭉해진 지갑에 울적해지는 직장인, 임대료에 버거워하는 자영업자 모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극장 사업자들 역시 월세 내느라 등골이 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적자 없이 운영되는 예술영화전용관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씨네코드 선재 역시 힘겹게 임대료를 충당하며 극장 운영을 유지해 왔습니다. 대체로 사정이 그렇다보니, 요 몇년 간 경영난을 견디지 못한 전용관들의 폐업이 줄을 이었습니다. 2006년부터 종로 씨네코아, 명동 씨네콰논(CQN)과 중앙시네마 등이 줄줄이 문을 닫았습니다. 가뜩이나 전용관이 부족한 지방은 사정이 더 나쁩니다. 경남 지역의 유일한 예술영화관 거제 아트시네마가 지난해 10월 폐관했고, 대구 동성아트홀도 올해 2월 문을 닫았다가 지역 독지가의 도움으로 겨우 회생했습니다.

이 와중에 영화진흥위원회는 독립·예술영화전용관 사업주들이 반발하는 예술영화 유통배급 지원 사업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새 정책의 골자는 영진위로부터 위탁받은 사업체가 선정한 영화 48편 가운데 24편을 골라 일정 기준 이상 상영한 15개 전용관과 지방 상영관 10곳에 지원금을 주겠다는 것이죠. 이는 지금까지 예술영화전용관을 지원해오던 범주를 축소한 것은 물론, 각 상영관의 프로그램 편성 자율권을 침해하는 일입니다. 보다 다양한 작품이 상영될 기회도 줄어들 수 밖에 없죠. 극장 관계자들은 해당 사업을 백지화하고 전면 재논의할 것을 요구했지만, 영진위는 위탁사업자를 선정하고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예술영화전용관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마당에, 영진위가 전용관들의 자생력을 키우겠다며 벌이는 엇박자 행정에 쓴웃음이 납니다.

원승환 독립영화전용관 확대를 위한 시민모임 이사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예술영화관이 위기인 건 전 세계적인 흐름이다. 씨네코드 선재가 문 닫는 날, 일본 시부야의 예술영화관 시네마라이즈도 문을 닫았다. 대기업이 예술영화 상영에 참여하면서 기존 전용관은 시설이나 서비스 경쟁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며 “그래도 영화진흥기구가 있기 때문에 일본에선 한국의 상황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영진위가 사라진 것도 아닌데 기구가 없는 나라와 마찬가지로 예술영화관이 문 닫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답답함을 토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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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원 이사는 단순히 금전 지원 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경우 오랜 전통의 예술영화관이 경영상 어려움을 겪거나 시설 개선 이슈가 생기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관객 중심의 정책을 고민하고, 시장의 거대 사업자들에 대한 규제도 열심히 한다”면서 “시장에서 살아 남으려면 어떤 방식으로 경쟁하는가가 중요하다. 미국의 경우 극장이 문 닫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도록, 예술영화관 측에 경영 컨설팅을 해주기도 한다. 영진위는 대기업도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시장 상황에서 (예술영화관이)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경영해야 하는 지 고민도, 이를 반영한 정책도 없다. 예술영화관이 경영을 정상화 해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가장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예술영화 전용관이 설 곳을 잃어가는 현실은, 한국영화의 미래에도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멀티플렉스 극장의 다양성 영화 상영관이 기존 예술영화전용관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투자·배급사가 극장 운영을 겸하고 있는 구조에선, 다양성 영화 중에서도 자사(혹은 계열사)가 배급하는 영화가 우선 순위가 됩니다. 결국 멀티플렉스가 예술영화 전체 시장의 규모를 키울 수 있어도, 다양한 작품의 고른 상영 기회를 보장하진 못하겠죠.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들의 입지는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영화의 질적인 발전을 위해서라도, 예술영화 전용관들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위한 대책이 시급해 보입니다.

ha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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