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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오늘도 인생을 배웁니다, 그림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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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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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어른들은 왜 그림책에 빠져들까

수학강사 송호현(41)씨는 마흔 살에 그림책을 만났다. 지난해 초 사십 문턱에서 여러 힘든 상황이 닥쳤다 했다. 우연찮게 접한 레오 리오니의 <새앙쥐와 태엽쥐>. “이렇게 간결한데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구나. 종이를 찢기(콜라주)만 해놨는데, 그 단순함이 내게 다가왔다. 그림책은 이 나이가 되어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을 퍽 다정한 어조로 알려준다. 질책보다는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어’라고.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하면 내가 좀더 편해질 수 있겠구나, 위로를 많이 받았다.”

■ 그림책에 빠진 어른들 그림책 읽는 어른들이 부쩍 늘었다. 어린이 전유물이거나 어린 자녀에게 읽어주던 데에서 벗어나, 어른들이 독자층으로 나서고 있다. 어른들의 그림책독서모임도 점점 늘고 있다. 글과 그림이 어우러져 문학과 미술이 함축적으로 응집된 장르. 그림책은 최근 2~3년 사이 독자를 진화시키며 어른들에게 재발견되고 있다.

김남우(33·출판사 마케팅담당)씨는 ‘아내 따라’ 그림책에 빠졌다. 아내 김상숙(31·주부)씨가 지난해 봄 서울 공덕동 주민문화공간 ‘늘장’에 갔다가 그곳에서 첫발을 갓 떼려던 그림책동아리 ‘청년들의그림책읽기’를 만났다. 20~30대 남녀회원 10명가량과 한달에 한번 3시간씩 함께 책을 봤다. 즐거워하는 아내의 권유에 두어 달 뒤 남편이 합류했다. 아직 아이가 없는 이 부부는 어른들끼리 그림책 읽는 시간을 “지친 일상의 회복”, “그림책의 여백이 주는 해방감”이란 말로 표현했다. 이 동아리를 이끌고 있는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한명희(35) 대표는 “함께 읽는 날 회원들을 기다리노라면 저기서부터 활짝 웃으며 온다”고 전했다.

어른 독자의 등장 뒤엔 국내 창작 그림책의 비약적인 성장이 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국내 그림책 도약기에 그림책을 읽고 자란 세대, 그 시기 자녀한테 읽어준 세대 중 일부가 동시에 성인이 되거나 중장년에 접어들며 그림책을 찾는다고 볼 수 있다. 2010년 무렵부터 한국 그림책이 국제적인 상을 잇따라 받으며 세계 수준으로 올라선 것도 한몫했다. 천지현 창비 그림책팀장은 “우리 그림책의 예술성이 높아지면서 어른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철학적 그림책도 다수 나왔고, 이런 점들이 대중들에게 다가서는 듯하다”고 말했다. 시처럼 짧은 텍스트가 이미지와 영상에 친숙한 세대에 소구한다는 분석도 있다.

■ 성인 그림책동아리 쑥쑥 그림책모임은 온·오프라인 양쪽에서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온라인 성인 그림책동아리 가운데는 회원이 10만명 이상인 곳도 있다. 2010년부터 매년 12만~13만명의 영유아에게 책(주로 그림책)을 나눠줘온 책읽는사회문화재단에 등록된 독서모임 중 그림책 관련 동아리는 100곳이 넘는다. 올해 그림책 읽는 어른 동아리에 매달 2권씩 책 건네는 사업을 시작한 사계절 출판사는 애초 15곳을 지원할 계획이었으나 60곳으로 늘렸다. 300개 동아리에서 지원이 몰렸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에선 주로 도서관을 둥지 삼는다. 청주 초롱이네도서관, 제주 설문대어린이도서관과 갤러리 제라진, 용인 느티나무도서관, 전주 아중도서관이 대표적이다. 전주 ‘내마음의그림책’ 동아리는 30~60대 성인 남녀 20여명이 회원이다. 주부를 비롯해 퇴직교사와 자영업자까지 직업도 다양하다. 두 아이 엄마인 이 모임 대표 전선영(38)씨는 “어른들은 보통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지, 누군가 읽어주는 것을 들은 경험이 별로 없다. 읽어주는 걸 들으면 그림 속 이미지들이 쏙 다가온다. 정서적으로 더 와닿는다”며 “자기 경험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한번씩은 다 울었다”고 말했다.

■ 출판사들 성인시장 개척 출판사 사계절은 올 1월부터 그림책 작가 강연회를 기존 어린이 대상에서 벗어나 어른 대상으로 매달 두차례씩 열고 있다. 지난달 이 출판사가 연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강연에는 사흘간 성인 독자 600여명이 몰려들었다. 애초 40~50명을 수용하는 공간을 빌렸다가 참가 신청자가 몰려들자 장소를 바꾸기도 했다. 출판사 보림은 2010년부터 일찌감치 ‘성인 시장’ 개척에 나섰다. 성인 소장품을 겨눈 보림의 ‘더 컬렉션’ 시리즈(현재 총 9권)는 ‘예술성 짙고 실험적인 그림책’을 표방하여 나온 다소 고가의 그림책들이다. 3만~4만원대의 가격에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비룡소도 2012년 어른을 겨눈 ‘지브라’ 시리즈를 시작해 지금까지 7권을 냈다. 그림책 전문 출판사 재미마주와 이야기꽃이 내는 책들도 예술적 색깔이 뚜렷한 만큼 어른 독자층이 많은 편이다. 창비의 ‘우리 시 그림책 시리즈’(전 15권)도 성인층의 호응이 크다. 사계절은 2003년부터 올 1월까지 ‘초등생이 보는 그림책’으로 내놨던 시리즈 가운데 어른들에게 호응이 높은 책을 뽑아 올 3월부터 ‘디어 시리즈’(현재 총 22권)로 내놨다. 이 출판사는 최근 2~3년 사이에 그림책 전문 서점을 통해 성인 독자들의 불평을 종종 들었다고 한다. 성인들이 그림책을 사 읽으려다 ‘초등생 그림책’ 독자연령 표기 때문에 민망해한다는 것이다. 그림책 읽는 성인 모임이 출판사로 직접 30부가량씩 단체 주문을 해오는 예도 많다고 한다.

김진 사계절 그림책팀장은 “출판사보다 독자가 먼저 움직였다. 애초 ‘초등생이 보는 그림책’ 시리즈를 낸 것도 2000년대 초만 해도 그림책 떼고 나서 읽기 책을 읽는 식으로 취학 전 유아들만 그림책을 읽는다는 인식이 컸기 때문이었다. 초등생이 그림책을 안 보는 분위기여서 부러 그리 지었는데 이제 그림책이 유아·초등뿐 아니라 전 세대를 아우르는 장르로 자리잡는 것 같다”고 말했다.

■ 그림책도시, 그림책마을도 그림책은 지역사회와 결합해 주민 문화예술 활동의 매개 구실도 하고 있다. 성인 독자층이 넓어지는 또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청주·제주를 중심으로 회원 100명이 활동하는 전국 단위 네트워크인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은 현재 충남 부여군 송정리에서 그림책마을 사업을 하고 있다. 한명희 대표는 “송정그림책마을에서 그림책을 함께 나눌 공간을 만들고 마을이 지닌 오래된 이야기나 주민들 기억에서 같이 나눌 이야기를 찾아내 이를 씨실 삼아 마을 그림책을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올 초 서울에서 50~70대 시민들과 함께 ‘청춘예술대학-내 인생의 그림책’을 펼쳤다. 참가자 9명이 올 4~11월 7개월 동안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아 9권의 그림책을 직접 쓰고 그렸다.

올 초 그림책특화도시로 선정된 강원 원주에선 사회적 기업 ‘그림책도시’가 시의 지원을 받아 시내 곳곳에 그림책카페를 만들고 있다. 기존 카페에 서가와 ‘그림책카페’ 명패를 달아주는 방식이다. 무실동에 있는 ‘커피블럭’을 비롯해 올해 이미 12호점까지 열었다. 이 공간들을 작은 그림책도서관 겸 주민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구상이다.

■ 내게 주는 선물, 성인 문화소비의 진화 그림책에 빠진 수학강사 송호현씨는 비혼이지만 온라인 카페 ‘그림책읽는엄마’ 회원이다. 함께 그림책 읽고 글 올리며 “공감의 기쁨을 누린다”고 했다. 그는 한달 25만~30만원씩 들여 30권가량의 그림책을 구입한다. 자신이 “유일하게 지출하는 문화 소비”라고 했다.

이야기꽃출판사 대표 김장성(그림책학교 ‘힐스’ 교사)씨는 “그림책은 간결하기에 본질을 담는다. 본질적인 걸 직관으로 접근하게 해주는 장르적 매력이 있다”며 “음악회나 전시장을 가듯이 그림책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소비하며 나에게 선물을 주는 어른층이 느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림책 작가 이상희(그림책도시 대표)씨는 “경제적 빈부차보다 문화적 빈부 격차가 더 큰 문제인데, 그림책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림책은 소장할 수 있는 저렴한 예술품이고, 누구나 쉽게 나누고 공감할 수 있다. 보는 것만으로 예술활동이 된다”고 말했다.

허미경 선임기자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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