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커버스토리]YS, 당신에게 무엇이었습니까

댓글 12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각 세대가 기억하는 ‘김영삼 세상’

대통령은 평범한 시민들에겐 하나의 세상이다. 대통령의 죽음은 한세상이 저물었다는 것을 뜻한다.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리에게 어떤 세상이었을까. 그 세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금, 우리에겐 무엇이 남아 있을까. 각 세대가 기억하는 ‘김영삼 세상’ 속으로 들어가 봤다.

경향신문

■20대 : 교과서로 만난 대통령 - 현대사에 큰 획 그은 분이라 배웠죠

20대에게 김 전 대통령은 그저 훗날의 역사다. 직접 겪은 대통령이 아니다. 할아버지, 큰 산, 서사시로 인식될 뿐이다.

김효정(24·대학생) = 1991년생인 내게 김 전 대통령은 구체적인 기억은 없다. 다만 민주화 이후 첫 대통령이라 현대사적으로 의미가 큰 사람이라는 걸 학교에서 배웠다. 아쉬운 건 죽음 이후에야 업적이나 정신이 부각되는 느낌이다.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밀고 나갔던 걸 보면 멋있다. 김 전 대통령은 내가 추구하는 사상과 가치의 ‘터’를 만들어준 할아버지 같은 존재다.

김은산(24·한의대생) = 한 블로그에서 김 전 대통령을 ‘역사상 가장 무식한 대통령’이라고 표현한 글을 봤다. 그는 어쩌면 ‘무식’ 덕분에 정치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하나회 청산, 금융실명제 도입 등은 생각이 복잡하거나 선이 가는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3당 합당은 한국 정치에 엄청난 해악을 안겼다. ‘공(이) 3 과(가) 7’ 정도 되는 것 같다.

이은지(28·직장인) = 벌써 전직 대통령 3명의 죽음을 직접 겪은 건데 시대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이제 더는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경향신문

1994년 4월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 국회비준을 앞두고 전국 농민단체가 서울 관악구 보라매공원에서 쌀 시장 개방 반대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30대 : ‘문민키즈’ 그리고 ‘IMF키즈’- 열린 민주주의 속 우울한 ‘회색 시대’

30대는 복잡했다. 김영삼 정권 당시 초·중등생이던 30대 초반에게 김 전 대통령은 ‘첫 대통령’이었다. 임기 초반 문민시대의 탈권위적 분위기는 성장기 청소년이었던 이들에게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자각하게 했다.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대통령처럼 농담도, 사투리도 쓰는 대통령은 탈권위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반면 청년기를 보냈던 현재 30대 후반 세대에게 김 전 대통령은 ‘분노’의 대상이었다. 1995년 연세대 학생 노수석씨가 등록금 인상 반대를 외치다 목숨을 잃었고, 깃발만 봐도 가슴이 울컥했던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찍혔다.

박민수(32·직장인) = 국민학교에 입학, 초등학교 졸업. 김 전 대통령과 나는 이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영남 출신으로 보수적인 부모님은 5·18을 ‘광주사태’라고 불렀는데 5학년 때쯤 학교에선 민주화운동이라 가르쳤다. 우리 집에도 책 <YS는 못말려>가 있었다. 대통령을 유머의 소재로 삼고 깔깔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9살 때 알았다. 전(두환)·노(태우) 구속을 당시 대학생들은 형식적인 쇼라고 했지만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시대 분위기와 각종 개혁조치로 나는 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시민으로 자랄 수 있었다.

어청식(32·직장인) = 중학교 과학수업 때 일이다. 목소리 큰 애가 이것저것 하라며 명령조로 말을 했다. 난 “야 그걸 왜 하라 마라야. 문민시대에 말이야”라고 말했다. 교실에선 웃음이 터졌다. 나는 ‘문민정부’라는 말을 ‘강요와 명령이 무조건 통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IMF 구제금융 사태 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집 배달을 하면서 월 60만원을 받았다. IMF 전에는 월 80만원을 줬다고 한다. 이미 사회에 진출했던 사람들은 타격이 컸겠지만 나는 처음 출발해서 그런지 큰 타격으로 느끼지 않았다. 그의 핵심은 민주주의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초산테러를 당하면서도 민주화를 외쳤던 그의 부재가 안타깝다.

김영신(39·대학원생) = 19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휴대전화 번호 뒷자리를 ‘0318’로 정해서 지금까지 쓰고 있다. 개인적으론 이 번호가 김 전 대통령과 나의 관계를 말해주는 전부다. 다만 회색의 시대를 열었던 상징이라는 의미도 있다. 흔히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라고 하는데 그가 민주화세력을 대표했나? 5·16세력, 신군부와 손잡고 집권했다. 그뿐인가. 한총련, 범민련 등을 이적단체로 만들어 스스로 지하세력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다만 그에 대한 추모 분위기는 회색만도 못한 오늘을 사는 시민들의 조용한 항거 같다.

최혜경(38·연구원) = 1997년 대학에 입학한 내게 김 전 대통령은 이중적인 의미다.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했고 그 바탕 위에서 민주정부가 탄생했다. 자유롭고 다양성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20대를 보낼 수 있었다. 한편으론 실패한 정책의 직격탄을 맞은 세대이기도 하다. 한 가지만 잘하면 누구나 대학 갈 수 있는 시대를 열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게다가 IMF 사태로 경제도 나빠져서 졸업할 즈음엔 취업이 어려웠다. 그의 죽음에 많은 추모와 비판이 쏟아지지만 난 잘라서 말하기가 참 어렵다.

■40대 : 혼란의 시대 ‘부재했던’ 대통령 - 신자유주의에 빼앗긴 내 청춘 돌려줘

대부분의 40대에게 김영삼 정권 시절은 방황과 혼란의 시기였다. 한때 민주화 투사였던 그를 대통령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질감은 오랜 방황으로 이어졌다. 동지라 믿었던 선배들이 군사독재 후예정당으로 입당하는 걸 지켜볼 땐 항의편지라도 쓰고 싶었다. 권력의 방향과 개인의 방향도 엇갈렸다. 결국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삶이 속출하면서 제각각 낯선 길을 떠난 시기였다. 대통령이 누구인지 신경 쓸 여력이 없던 때였다.

장은석(41·직장인) = 김 전 대통령 집권 당시 광주지역 대학에 93학번으로 입학했다. 집회에 나가면 광주시민들은 “김대중 선생은 비록 대통령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이제는 문민정부다. 니들이 그러면 안된다”며 혼냈다. 하지만 1993년 말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으로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광주에서도 그제서야 ‘YS가 저러면 안되지’라며 학생들을 지지했다. 당시 그를 비하한 ‘영삼이의 일기’라는 노래가 나올 정도였다.

문지효(48·사업) = 김 전 대통령은 세상을 두 번 바꿨다. 하나는 군부세력 종식, 또 하나는 IMF. 후자는 모든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의 뜨거운 맛을 처음 느끼게 한 계기였다. 아버지는 돈 벌어오고 어머니는 집에서 살림하던 시대에서 엄마 아빠 안 가리고 돈을 벌어야 했던 시대로. 돈이 세상에서 제일인 시대로 바뀐 게 그즈음이다. 모든 게 다 자본주의에 말살된 계기였다. 그의 화법으로 하면 “내 청춘 돌리도”라 하고 싶다.

이상원(47·교수) = 1995년에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앞서 1992~1993년을 권력재편기로 보면서 어떤 사회, 어떤 권력을 만들어야 할지 논쟁이 치열했다. 1992년 대선에서 민중진영이 패배한 뒤 원내정당운동, 전위운동, 신사회운동, 유학 등 우린 낯선 길로 향했다. 김영삼시대는 대통령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여야 하고, 누굴 미워하고 용서하며 살아야 할지 고심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1995년 연세대 사태, 1996년 한양대 사태는 큰 충격이었다. 혼란의 연속이었다. 사회주의 붕괴를 우리의 위기로 과도하게 결합시켰다는 자성도 들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민자당 대통령’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경향신문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3당 합당을 발표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50대 : ‘정치인’과 ‘대통령’ 김영삼의 괴리 - 반독재 아이콘의 3당 합당에 당혹

50대에게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이자 3당 합당 주역이라는 충격파로 받아들여졌다. 괴리감이 컸다. 김영삼이란 아이콘은 숨죽여 민주화라는 열망을 품게 했던 야당 지도자였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당혹감 그 자체였다. 지금 그의 죽음에 감정이입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유상준(53·자유기고가) = 중학교 때 시골에서 꽤 많은 토종닭을 키웠다. 지금 돌아보니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은 그때쯤에 나온 것 같다. 단식하고 닭장차에 실려가던 정치인들 모습은 독재시대를 수놓은 풍경이다. 머뭇거리다 아무것도 못했던 정치인들과 달리 그는 분명한 행동가적 면모를 보였다.

박혜영(58·문화예술인) = 김 전 대통령의 죽음이 시민들에게 의미가 있을까 싶다. 감정적 동요를 야기하는 죽음은 아니라는 거다. 역사적 평가에 맡겨진 대통령이랄까. 그가 YH 여공들과 함께 운명을 걸었던 것엔 지금도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비록 대통령으론 한계가 많았지만 정치인 김영삼에겐 우리 모두가 빚졌다고 생각한다. 반독재투쟁 당시 그가 보여준 영웅적 기상이 그립다. 퇴행하는 이 시절, 누가 그처럼 목숨을 걸고 싸워줄까.

심지훈(55·언론인) = 김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은 민주화 대장정의 디딤돌 하나, 권력에 경도된 왜곡된 정치의 상징, 개발연대의 악성 정치를 계승한 흉악한 정치인 정도다. 왜 지금 그를 이렇게 미화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그와 대통령 직선제 투쟁을 같이했다. 1986~1987년쯤 직선제 쟁취 마산대회를 앞두고 실무 준비를 하던 중 보안대에 잡혀가 무지하게 맞았다. 당일 대회 후에 풀려나 무전 택시를 타고 시내 한 일식집에 갔더니 그가 “심 동지, 고생 많았소. 술 한잔 받으소” 해서 술도 마셨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운동의 상징성이 컸다. 그러나 3당 합당을 보며 가슴 아팠다. 그 뒤로 그는 ‘더는 기대하지 않았으니 더는 실망할 것도 없는’ 사람이 됐다.

경향신문

1979년 YH무역이 부당 폐업을 공고하자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노동자들의 신민당 당사 농성을 빌미로 박정희정권은 김영삼 의원을 제명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60대 : ‘열망과 실망’의 반복 - 민주화 함께 외친 아스팔트 위 동지

60대는 김 전 대통령에게 동질감을 갖는 세대다. 아스팔트 위에서 민주화를 함께 외친 주역이었다는 동질감. 그러나 IMF 사태로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열망에서 실망의 사이클’을 가장 선두에서 겪었던 세대다.

최순영(62·부천 친환경의무급식운영위원장) = YH무역 사건 때 우리가 신민당사를 찾아간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당내 계파 갈등 속에서도 정당 민주화를 주장, 괜찮은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기대했던 대로 그는 흔쾌히 돕겠다고 했다. 매번 186인분 식사를 시켜줬다. 내가 아이를 출산했을 때는 손명순 여사가 쌀과 미역을 직접 가져왔다. YH 사건 10주년 때는 모란공원에 김경숙 열사 묘와 묘비를 만들었다. 이때도 김 전 대통령은 흔쾌히 100만원을 지원해줬다. 내게 그는 역사발전의 계기를 열어준 대통령이었다. IMF 사태도 시대 흐름이 그랬던 것 아닌가.

<구혜영·박은하 기자 koohy@kyunghyang.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체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