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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일상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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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진관寺에서 보낸 하룻밤

조선일보

서울 진관사 함월당. 템플스테이 주요 프로그램이 이곳에서 진행된다. 눈앞에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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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서울 은평구 진관사(津寬寺). 북한산 서쪽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지난 토요일 오후 2시 이곳에 들어섰다. 해가 많이 짧아졌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바람이 차다. 하늘에 반달이 걸려 있다. 촘촘히 뜬 별들이 청명한 빛을 내고 있었다. 밤하늘을 바라본 게 언제였던가. 문득 '그동안 무엇에 쫓기며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졸졸 흐르는 개울 소리가 들린다. 눈앞 소나무 숲을 바라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자연 속에서 한 박자 쉬기

템플 스테이(temple stay), 절에서 보내는 하룻밤이다. 최근 많은 사람이 '힐링'의 장소로 사찰을 찾고 있다. 각박한 삶에 작은 쉼표를 찍는 것. 장소는 절이지만 불교 신자만 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 대부분 종교가 없거나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이다. 미국 부통령 부인 질 바이든 여사, 백악관 수석 셰프 샘 카스, 사우디아라비아 왕자도 다녀갔다. 반드시 예불을 드려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마음 가는 대로 편하게 있다가 편하게 돌아간다. 도심 사찰이지만 깊은 산 속 같다. 울창한 나무 숲과 맑은 개울물이 반긴다. 공기는 맑다. 멀리 여행을 떠나온 듯하다. 사면은 온통 산이다. 밀려 있는 가스 요금, 처리해야 할 업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나 같은 걱정을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회색 바지와 황토색 조끼로 갈아입는다. 피식 웃음이 난다. '오늘은 무슨 옷을 입어야 하나' 고민하던 내 모습이 저만치 멀어진다. 왜 그렇게 작은 일들에 스트레스받으며 살았을까. 눈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던 스마트폰도 이틀 동안 꺼두기로 한다. 내 삶을 지배하던 외물(外物)을 하나씩 버리니 보고도 느끼지 못했던 자연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 비우는 108배

새벽 3시 반. 목탁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린다. 타종 소리가 산기슭에 울려 퍼진다. 아침 예불을 알리는 소리다. 뜨끈한 방바닥에서 일어나기 싫다. 겨우 눈을 떠 살짝 문을 열었다. 아침 공기가 차다. 상쾌하다. 한 번도 108배를 해본 적이 없다. 처음 염려와 달리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최선을 다할 때 이루지 못할 게 없다는 믿음으로 절합시다." 녹음된 스님 음성에 따라 절한다. "제 하루는 날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일로 펼쳐질 것을 믿으며 절합시다." 또 절한다. 스님 목소리에 맞춰 잇달아 절하는 참가자들의 얼굴에 어느새 땀방울이 맺혔다. 종교의식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횟수가 거듭되면서 다리를 주무르거나 지친 기색을 보이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마지막에는 '해냈다'라는 성취감으로 얼굴 가득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부담 없는 사찰 음식

조선일보

정갈한 나물과 밥. 진관사는 사찰 음식으로 유명하다. /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제공


불교식 발우 공양(식사)은 그릇에 남아 있는 음식을 단무지로 닦아 물과 함께 모두 삼켜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진관사는 그런 정통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기존 발우 공양 대신 현대식 뷔페 스타일로 제공한다. "왜 발우 공양을 하지 않느냐"는 항의도 있다고 한다. "발우 공양을 체험한 외국인들이 메스꺼움에 화장실로 직행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난 4년간 템플 스테이 하러 외국인 1393명이 이곳을 찾았다. 두부구이, 시금치, 무조림, 배추김치, 된장국 등 정갈한 사찰 음식이 10여가지 차려진다. 구수하고 담백하다. 비구니 사찰인 진관사는 사찰 음식으로 유명하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하며 생각했다. 먹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다고.

"행복은 당신의 의무"

이튿날 아침 식사가 끝나면 절을 포행(산책)한다. 템플 스테이 담당 선우 스님은 참가자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행복하세요"라고 말했다. 행복? 그래, 바쁘다는 핑계로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았구나. 걱정과 근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 행복을 담을 공간을 스스로 없애고 말았구나. 다시 월요일, 회사에 출근한다. 스님에게서 들은 얘기가 문득 떠오른다. "인생의 주인공은 당신입니다. 주위에 현혹되지 말고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가요. 행복이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정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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