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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예약문화 세계 꼴찌… '펑크' 선진국 4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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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show 사라진 양심 '예약 부도'] [1]

15년전 정부서 '예약캠페인' 달라진 것 없이 뒷걸음질만

연말 대목엔 허수예약 급증… 30% 다반사, 70%까지 부도

예약금 얘기엔 "건방지다"

한국은 '예약 부도'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약속 지키는 데 꼴찌라는 말이다. 2002 월드컵을 한 해 앞둔 2001년 한국소비자원이 전국 식당·병원·항공사 등 71개 서비스 사업자를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선 예약을 해놓고 아무 통보도 없이 나타나지 않는 예약부도 비율이 평균 15%에 달했다. 4~5%에 불과한 북미·유럽보다 서너 배 높은 수준이었다. 이에 정부가 '예약을 지키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15년. 한국의 예약 문화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뒷걸음질을 쳤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개인·영세 업주들에게 더 타격

본지가 최근 전국 서비스업(식당·미용실·병원·고속버스·소규모 공연장) 사업장 100곳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예약 부도율은 평균 15%에 달했다. 15년 전 한국소비자원 조사와 같은 수치다. 식당 예약 부도율은 20%였다. 소비자원 조사(11.2%)의 약 두 배가 됐다. 소비자원 조사에서 18%였던 대학병원 등 3차 진료기관의 예약 부도율은 5~8%로 낮아졌지만, 일반 병원·의원은 18%로 제자리였다. 2000년대 들어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미용실도 부도율이 15%에 달했다. 어떤 식당에선 각종 기념일이나 공휴일 때 예약 부도율이 60~70%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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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 손님 위해 정성껏 상 차렸지만… 오늘도 14팀 중 6팀 야속한 '노쇼' - 13일 저녁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종업원이 예약 손님을 받기 위해 상을 차리고 있다. 이 식당에는 이날 전체 14개 예약팀 가운데 6팀이 아무 연락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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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 예약 부도율은 소비자원 조사에서 20%였다. 그러나 10년쯤 전부터 신용카드를 통한 선(先)결제, 위약금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최근엔 부도율이 4~5%대로 내려갔다. 대형병원들도 전문 콜센터 시스템을 구축해 진료 하루 전이나 당일에 예약 환자에게 일정을 다시 안내하는 방식으로 예약 부도율을 크게 낮췄다.

문제는 예약 전담 직원을 두기 어렵거나 대체 업소가 많은 식당, 일반 병원, 미용실 등 개인사업자들이다. 부도율이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업주들은 "전체 매출에서 예약이 차지하는 비율은 10년 전보다 늘었지만 예약을 깨는 손님들도 따라 늘어 피해가 막심하다"고 했다. '일단 남보다 먼저 예약부터 해놓고 보자'는 소비자들의 잘못된 인식과 문화가 빚어낸 일이다.

◇"손님한테 건방지게" 한마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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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프렌치 레스토랑 '팔레 드 고몽'의 예약 장부. 예약을 해놓고 나타나지 않은 고객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줄로 그어져 있다. /이진한 기자


각종 기념일이나 연말 대목 시즌이 되면 식당 업주들은 '진짜 예약 손님'을 가려내는 데 홍역을 앓는다. '일단 예약부터 해놓고…' 식의 허수(虛數) 예약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이때는 예약 부도율이 30% 넘는 건 다반사고, 심하면 70%까지 올라간다. 프렌치·이탈리안 레스토랑처럼 음식을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하는 곳은 예약 하루 이틀 전부터 손님들에게 "진짜 오는 게 맞느냐"고 수시로 확인하는 게 중요한 업무가 된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프렌치 레스토랑 '팔레 드 고몽'을 운영하는 서현민씨는 "여러 곳을 중복으로 예약해놓고 당일 기분 따라 선택하는 '예약 쇼핑' 손님들 때문에 애를 먹는다"고 했다. 회사원들이 주로 찾는 서울 태평로의 한 식당 주인은 "예약 규모가 주로 5~10인 단위인데 매일 '노쇼'가 4~5건 된다"고 했다.

일부 식당은 이런 위험을 피하려고 예약금을 받거나 예약을 깰 경우 위약금을 물리고 있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김모(52)씨는 "예약을 어기는 손님들이 많아 예약 인원 10명 내외는 5만원, 20명 이상이면 10만원의 예약금을 받고 있다"며 "하지만 예약을 깨 놓고 며칠 뒤에 돈을 돌려달라고 떼쓰는 손님들 때문에 골치 아프다"고 했다. 실제로 예약금 이야기를 꺼내면 전화를 중간에 끊거나 "건방지게 손님한테…" 하며 핏대를 세우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라고 업주들은 말한다. SNS를 통해 '다른 식당도 널렸는데 예약금 받는 곳에 왜 가느냐'는 악성 게시물이 돌기도 한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레스토랑 주인은 "3년 전부터 예약금을 받기 시작했지만 손님들의 반발이 심해 이제는 크리스마스처럼 극히 일부 기념일에만 예약금을 식사 값의 30% 정도 받고 있다"고 했다.

예약 부도의 일상화는 막대한 사회·경제적 손실을 낳는다. 본지와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에서 예약 부도가 낳는 5대 서비스 업종 매출 손실이 연간 4조5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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