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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단독] “카드 안 받아요”…음지로 숨는 자영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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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거래로 세금탈루 확산

금융사 직원인 김복민씨(45)는 지난주 서울 중구 을지로에 있는 한 치과에서 임플란트를 하면서 카드로 150만원을 결제하는 대신 현금으로 120만원을 냈다. 현금결제를 하면 탈세를 돕는 결과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30만원(20%)이나 깎아주는 유혹을 거부하기 힘들었다. 지난주 대구 수성구 한 대형할인마트에서 ‘블랙 프라이데이’ 할인행사로 나온 60만원짜리 겨울양복을 산 임주희씨(42)는 현금으로 구매하면 10%(6만원)를 더 깎아준다는 말에 주변 현금지급기(ATM)에서 54만원을 인출해 결제했다. 주부 입장에서 6만원은 큰돈이었다.

지난달 서울 서대문구에서 종로구로 이사를 간 조남정씨(38)는 이삿짐업체 3곳의 견적서를 보니 모두 카드결제 시 110만원, 현금결제 시 100만원을 제시했다. 추석 직후 서울 양천구 신월동의 한 자동차정비업소에서 자동차 배터리를 교환한 김훈상씨(41)도 현금은 8만원, 카드는 8만8000원이라는 말에 현금으로 결제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네일숍은 ‘패키지 서비스 현금가 20만원, 카드가 23만원’이라고 버젓이 써붙여 놓았다. ‘현금결제 시 20% 할인’이란 안내문을 붙여놓은 이미용실도 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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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세무업계에 따르면 경기악화로 소비가 줄어들고, 자영업자에 대한 복지혜택이 늘어나면서 최근 들어 판매가를 깎아주는 조건으로 현금거래를 요구하는 자영업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현금거래는 병원, 한의원, 법무법인 등 고소득 직종은 물론이고 자동차정비, 이삿짐업체, 행사장 대여, 양복·가구, 키즈카페 등 서민업종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자영업자들은 카드결제나 현금영수증 발급 대신 현금으로 결제하면 해당 제품과 서비스에 최소 10%에서 최대 30%까지 할인해 주고 있다. 고소득업종이나 대형사업장일수록 할인폭이 크다. 소득세율이 높기 때문이다. 자영업자는 현금거래로 매출을 축소하면 부가가치세(10%)와 종합소득세(6~38%)를 탈루할 수 있고 카드수수료(1.5~2.2%)도 아낄 수 있다. 일부 자영업자들은 매출 축소 신고로 저소득자가 돼 국민임대주택 입주, 근로장려금 수령 등 복지혜택을 누리기도 한다. 한 소매업자는 “예전엔 판매기준가를 제시한 뒤 카드로 결제하면 돈을 더 받는 식이었지만, 요즘은 판매가격을 부른 뒤 현금으로 결제하면 깎아주는 방식이 대세”라며 “경기가 나쁘다 보니 깎아주겠다고 해야 소비자들이 지갑을 연다”고 말했다.

국세청의 ‘2015년 국세통계 조기 공개’ 자료를 보면 지난해 탈세제보 포상금 지급 금액은 336건, 89억원으로 전년(197건, 34억2400만원)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했다. 현재 변호사업, 치과의원, 유흥주점, 교습학원, 골프장 운영업 등 47개 업종이 현금영수증 발급 의무업종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업종은 10만원 이상 결제 때는 무조건 현금영수증을 발행해야 하지만 소비자가 묵인하면 560만명이나 되는 자영업자들을 일일이 단속하기가 쉽지 않다.

2008년 기준으로 국내 소득세 탈루 규모는 국민총생산(GDP)의 2.3%인 21조8000억원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한 과세 손실도 4조원이 넘는다. 홍기용 한국세무학회장은 “자영업자의 세금탈루로 인해 줄어든 소득세액은 근로소득세나 법인세 등으로 메워야 한다”며 “소비자도 당장은 이득인 것처럼 느끼겠지만 과세체계가 흔들리면서 부담이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박병률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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