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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취재파일] 훈민정음 상주본, 강제로 찾을 방법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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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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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유물인 훈민정음 상주본을 현재 보유하고 있다는 배모 씨가 상주본을 기증하는 대가로 1,000억 원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논란이 가열되고 있습니다. 마침 한글날을 맞아 관련 내용이 보도된 이후 여론이 말 그대로 들끓고 있습니다. 대부분, 이 귀중한 유물을 어떻게든 하루 속히 국가가 넘겨받아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들입니다.

이를 위해 국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라도 1,000억 원을 마련하자는 이들도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복잡한 과정이야 어찌됐든 현재 법적인 소유권은 문화재청이 갖고 있다고 하니 소유권을 강제집행해서 물건을 빼앗아 오면 되지 않느냐는 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방법 모두 현실성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우선, 소유권 강제집행은 말 그대로 문화재청이 법으로 인정받은 소유권에 따라 상주본을 받을 수 있도록 법으로 강제하자는 겁니다. 강제집행 절차에 들어가면 배 씨가 응하지 않을 경우 배 씨를 구속할 수 있습니다. 매우 강력한 수단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엔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배 씨가 구속도 불사하겠다고 나올 경우 상주본은 여전히 확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힘을 앞세우는 강제집행의 더 큰 문제는 '부작용'입니다. 자칫 배 씨와 문화재청 사이 감정의 골을 더 깊게 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실제로 '1,000억 원'에 가려서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현재 배 씨의 요구조건 가운데 또 하나는 자신을 '절도범으로 몰았던 이들의 사과'가 들어있습니다.

사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상주본 논란이 7년 넘게 이어지면서 꼬일대로 꼬인 근본 원인은 양측 간의 감정적 대립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배 씨가 처음 상주본을 확인했을 때 적절한 보상을 해 주고 타협해서 기증 방안을 찾았다면 사태가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라는 얘깁니다.

실제로 2008년 최초 공개 당시 배 씨는 문화재청에 기증 대가로 보상금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요구액도 거액이었지만 적어도 최근 요구하고 있는 1,000억 원 보다는 훨씬 적은 액수였습니다. 그런데 이후 소유권을 둘러싼 복잡한 분쟁이 벌어지면서 보상과 기증에 대한 제대로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언론을 통해 익히 보도됐던 그 과정을 다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2008년 배 씨가 상주본을 공개하자, 조 모 씨가 상주본의 원소유주는 자신이라며 민사소송을 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문서들을 배 씨에게 헐값에 무더기로 팔았는데 상주본이 그 속에 섞여있었다는 주장입니다. 배 씨가 상주본의 가치를 알면서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헐값에 사갔으니 훔쳐간 거라는 주장입니다. 반면 배 씨는 상주본이 조 씨에게 산 무더기에 포함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민사소송에선 대법원까지 가서 결국 조 씨가 승소했습니다. 하지만 배 씨는 판결에도 불구하고 상주본을 조 씨에게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조 씨가 돌려받지도 못한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기증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진 형사소송에선 훔쳤다는 증거가 충분치 않다며 배 씨의 절도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났습니다.

그 결과 현재 법적 소유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민사소송에서 승리한 조 씨가 문화재청에 기증했으니 법적으로는 분명 문화재청이 주인입니다. 하지만 배 씨는 여전히 상주본을 어딘가에 감춰 두고 돌려주길 거부하고 있습니다. 검찰까지 나서서 압수수색을 벌였지만 상주본의 행방을 찾지 못했습니다. 배 씨는 형사소송 과정에서 절도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나왔으니 이전에 있었던 민사소송 결과가 잘못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현재 배 씨의 주장은 억지입니다. 민사와 형사는 별도의 소송이기 때문에 나중에 이뤄진 형사 소송의 결과는 앞선 민사 소송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배 씨가 자신의 소유권을 인정받으려면 다시 소송을 내서 이전 민사소송의 결과를 뒤집어야 합니다.

문제는, 꼬일대로 꼬여서 7년 넘게 이어져 온 현재 상황이 법적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으로는 해결이 안된다는 점입니다. 국민들이 돈을 모아서라도 차라리 구입을 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첩첩산중입니다.

우선 가격입니다. 국보인 간송본보다 보존 상태도 더 좋고 해석도 달려있다는 상주본은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대로라면 '무가지보(無價之寶)'입니다. 너무 귀중해서 감히 가격을 매기기 힘든 보물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배 씨의 1,000억 원 요구는 억지라는 게 일반적인 국민감정입니다.

가격을 떠나서 돈을 주고 구입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이들도 없지 않습니다. "'국보급' 유물이라고 하는데, 그 정도로 중요한 유물이라면 당연히 국가가 소유권을 갖는 게 아니냐? '국보급' 유물을 개인이 움켜쥐고 국가를 상대로 돈을 요구하는 게 맞느냐?" 하는 주장입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국보급' 아니라 '국보'여도 개인이 소유한 유물이라면 불법으로 취득한 증거가 없는 한 국가가 소유권을 강제할 수 없습니다. 당사자가 선의로 기증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아무리 국가라도 필요하면 돈을 주고 사야 합니다. 헌법에 보장된 사유재산권을 침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 우리나라의 수많은 국보와 보물들이 현재 개인 또는 사립미술관 소유입니다. 거래도 자유롭습니다. 개인간 거래든 경매를 통한 거래든 얼마든지 사고 팔 수 있습니다. 물론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화재급 유물의 경우 최소한의 법적 제약은 받습니다. 우선, 해외반출은 안됩니다. 법으로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둘째, 소유권에 변동이 생기면 15일 안에 그 사실을 문화재청에 신고해야 합니다.

물론, 상주본은 현재 법적 소유권이 문화재청에 있기 때문에 이런 일반적인 원칙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법적으로는 분명 문화재청 소유이니 문화재청이 배 씨에게 '보상금'을 지불할 의무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상주본을 둘러싼 법과 현실 사이의 적지않은 괴리입니다. 문화재청이 '강제집행'이라는 강수 대신 몇년 째 배 씨를 설득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최근의 관심을 보면서 배 씨 역시 상주본을 하루 빨리 공개해서 제대로 관리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을 분명히 느꼈을 줄로 압니다. 문화재청 역시 법적 소유권만 내세우며 마냥 배 씨의 변화를 요구하는 대신 좀 더 현실적이고 실효적인 해법을 하루 속히 찾아야할 필요성을 새삼 느꼈을 줄로 압니다. 문화재청과 배 씨 모두 이제는 지난 7년간의 묵은 감정을 털고 타협점을 진지하게 찾아야 할 때입니다.

[김영아 기자 youngah@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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