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신동립 잡기노트]찡그린 왕비 사진, 명성황후 맞나

댓글 42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뉴시스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549>

명성황후 사진, 정확히는 명성황후 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은 여럿이다. 그 중 122년 전 찍힌 사진의 주인공이 명성황후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1893년 발간된 프랑스 ‘피가로 일루스트레’ 10월호를 확보한 데 따른 것이다. 기사를 쓴 기자가 명성황후라고 명기한 여성의 사진이 실린 잡지다.

기자는 거빌(A B de Guerville·1869~1913)이다. 미국 시카고 박람회(1893)를 홍보하러 1892년 조선에 왔다. 거빌은 ‘마법의 등불’, 즉 환등기로 1878년 프랑스 파리 박람회 현장과 미국의 도시풍경을 관리들에게 보여줬다. 신문물의 존재가 조정에 소문이 났고, 거빌은 급기야 고종(1852~1919)과 민비(1851~1895)를 알현하기에 이르렀다.

기자의 상황 묘사는 구체적이다.

“얼마 후 우리가 왕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영사기가 설치돼 있는 또 다른 작은 곳으로 안내받아 갔다. 왕비나 왕자는 이 이례적인 영사 상영에 참석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병풍 뒤에 있었다. 외국인 남자는 왕비를 볼 수 없었고 지체가 높은 여자가 아니면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왕비를 볼 수만 있다면’하는 희망을 품어봤지만, 그런 예외는 헛되다고 생각하고 워싱턴의 백악관, 시카고의 20층 건물, 나이아가라 폭포, 빠른 철도, 그리고 박람회의 멋진 건물 등의 사진을 한국인들에게 제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이뤄졌다.

“그러나 첫 장면을 보자마자 병풍 뒤에서 나왔다. 너무 놀라서 입이 벌어지고 눈이 확 뜨였기 때문이다. 왕비는 가만히 있지 않고 사진이 투사되는 하얀 장막(스크린) 쪽으로 달려가서 마치 재생되는 방법을 이해한다는 듯 손으로 몇 번이고 만졌다. 그리고 그녀는 통역자를 불러서 그 장치와 사진 등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새로운 장면마다 그녀는 거기에 대한 정보를 묻고 모든 것에 흥미를 가졌다. 우리는 그녀가 아주 영리하다는 것과 나라를 이끌어가는 데 왕을 돕고 있다는 평판을 떠올리게 됐다. 그녀의 영향력은 아주 컸다. 그녀는 왕과 거의 같은 나이이며 자그마하며 아주 예뻤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극도의 열정이 최고조에 달했다. 왕과 왕자는 우리 곁으로 다가와서 한 시간 가까이 여러 가지 다른 주제에 대해서 매력적인 방법으로 우리와 얘기했다. 병풍 뒤에 앉아 있던 왕비는 대화를 주의 깊게 듣다가 가끔씩 아들을 불러서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왕은 우리를 즐겁게 할 어떤 것을 하고 싶어했다. 그는 우리에게 15일 후 외국 공사들을 초대해 큰 잔치를 열 것이니 그 전에 떠나지 말고 참석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박람회의 많은 것을 부러워했다.”

이처럼 세세한 글을 쓴 지면 한 가운데 민비의 사진을 실었다. 기사에 삽입된 사진 속 여성은 상식상 민비일 수밖에 없다. 이 사진을 뺀 나머지 사진들 가운데 허위 설명을 단 것이 없다는 점도 신뢰도를 높인다.

그러나 이 월간지 원본을 입수한 차길진 후암미래연구소 회장은 확언을 유보했다. 다만 “이 사진의 여인을 왕비라고 표기한 것은 ‘피가로 일루스트레’가 처음”이라고 특기할 뿐이다. 거빌에 대해서는 “그는 주로 왕실, 황제, 대통령, 교황 같은 특별한 인물들을 인터뷰한 기자다. 명성황후를 직접 만났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사실 만으로도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사진”이라고 짚었다.

1920년대 ‘사외이문(史外異聞)’도 언급했다. “고종이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전 궁중에서 사진 촬영을 한 사실을 기억하고 그 사진을 얻기 위해 수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고 했으니 명성황후의 사진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문화부국장 reap@newsis.com




<저작권자ⓒ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체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