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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사회의 위선을 향해 던져진 페미니즘 전사의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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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데니스 마샬

성폭력 피해자서 재기 조력자로7세부터 7년간 양조부에 성폭행

20대 독서로 페미니즘에 눈 떠

여성 구제단체 'Eaves' CEO로같은 처지 여성들에 새 인생정신적·육체적 손상서 회복 돕고

직업훈련에 주거 여건 마련까지

피해 여성이 자원봉사자 되기도英 정부 위선에 훈장 반납까지효율 높여 작은 정부 실현한다며 지원 예산 5년 전의 25%로

성노예 사연 만화화로 관심 호소

한국일보

캐머런 정부의 긴축 발표에 항의하기 위해 2011년 3월 26일 영국노동조합회의(TUC)가 연 집회 ‘긴축의 대안을 향한 행진 March for the Alternative’ 연단에 선 데니스 마샬. 그는 “빅 소사이어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명화된 사회”라며 “나는 부자와 대기업만이 아닌 인간을 중시하는 사회, 여성과 젊은이를 존중하는 사회, 힘 없고 가난한 이들을 돌볼 줄 아는 사회를 원한다”고 말했다. 작은 사진은 ‘아비케 이야기 Abike’s Story’의 첫 장면. YouTube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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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여성인권 운동가 데니스 마샬(Denise Marshall)은 1961년 12월 12일 런던 북부 하이버리에서 태어났다. 외판원이던 아버지는 두 살 때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재혼했다. 양부는 무능하고 폭력적인 가장이었다. 집에서는 부모에게 맞는 게 일이었고, 학교에서는 가난하다고 따돌림을 당하곤 했다고 그는 말했다. 9살 때 부모가 너무 싫어 찻잔에 표백제를 부은 적도 있는데, 정작 그 땐 부모가 그를 야단치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어 했다고 한다. 함께 살던 양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양할아버지의 강간이 시작된 것은 마샬이 7살 되던 무렵부터였다. 14살의 어느 날 자신을 또 덮치려는 양할아버지에게 마샬은 다가오면 죽이겠다고 말했고, 비웃으며 덤벼든 그의 다리를 그는 칼로 찔렀다. 강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2년 전인 12살 때 성폭행 사실을 알리려고 혼자 경찰서에 찾아간 적도 있었다.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어요. 오히려 쫓겨났죠. 70년대가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 ‘이브스 Eaves’를 찾아오는 어린 성폭력 피해여성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이 사회가 70년대 이후 얼마나 달라졌나, 진보하기는 했나 싶어 절망하곤 합니다.”(가디언, 201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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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전사(戰士)’가 실재한다면, 데니스 마샬이 그 전위에 섰을 듯하다. 영국 젠더 폭력 피해여성 구제 단체 ‘Eaves(for Women)’대표로서, 그는 유ㆍ청년기의 저 결기로 사회의 불의와 권력의 부당함에 맞섰다. 사건 현장에 그가 나타나면 경찰들의 태도가 달라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성폭력과 가정폭력 강제성매매 피해여성들의 피난ㆍ구호시설을 열고, 정신적ㆍ육체적 회복과 자립을 위한 창의적이고도 실질적인 여러 프로그램들을 도입했다. 그에게 피해자는 동정하고 시혜를 베풀어야 할 대상이기 이전에 불의에 부상 당한 자신의 동지였다. 그들의 위축된 자아를 북돋워 피해자(victim)가 아닌 생존자(survivor)로 다시 서게 하고, 나아가 다른 피해 여성을 부축하는 조력자(supporter)로 힘을 보태게 한 것은, 그가 그러했듯, 그들에게서 세상을 바꿀 힘을 찾고자 해서였다. 영국 왕실은 2007년 그에게 대영제국훈장(OBEㆍ4급)을 수여했다. 마샬은 4년 뒤 캐머런 ‘빅 소사이어티’의 위선을 향해 그 훈장을 집어 던졌다. 전사의 영혼을 지닌 캠페이너 데니스 마샬이 8월 21일 별세했다. 향년 53세.

마샬은 반스버리 여학교를 간신히 마친 뒤 곧장 일을 시작했고, 집을 나와 독립했다.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게 그 무렵이었고, 런던의 한 서점에서 자신의 처지와 다를 바 없는 여성들의 삶을 다룬 책을 읽으며 페미니즘을 알게 된 것도 20대 초반 그 무렵이었다. 그는 지방 신문사 행정직원으로 일하면서 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를 만났고, 곧장 커밍아웃했다. 그 일을 그는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85년 그는 성소수자 주거 인권단체인 스톤월 주거협회(Stonewall Housing Association, 83년 설립) 활동가가 된다. 아이를 갖고 싶었던 그는 한 게이 친구의 정자를 기증 받아 89년 인공수정을 통해 아들 데클란(Declan)을 출산한다. 파트너 리사(Lisa)와 더불어 데클란을 키우며, 그는 태어나 단 한 순간도 가지지 못했던 가정을 이뤘다.

성소수자로서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성 정체성을 깨달을 무렵 곁에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친구가 있었고, 함께 할 조직이 있었다.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하면서도 한사코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고통에 마음이 쏠린 것은 자신이 성소수자이기 이전에 젠더폭력의 피해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성운동을 시작했고, 2000년 1월 ‘이브스’의 CEO가 됐다. ‘이브스(Eaves)’는 젠더 폭력 피해 여성들의 자립ㆍ자활을 돕기 위해 1977년 설립된 단체다.

그는 2002년 ‘The Poppy Project(Poppy는 ‘pissing off pimps and puntersㆍ포주와 성매수자들 꺼져’의 약자)’를 시작한다. 국제 인신매매와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영국 최초의 피난처 프로그램이었다. 그와 이브스 활동가들은 피해자들이 정신적ㆍ육체적 손상에서 회복되도록 돕고, 불법이주문제 등 법적 문제를 맞서 풀고, 영국에 정착해 살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해왔다. 자존감 회복과 직업훈련, 취업 인터뷰 등을 교육하고 주거 여건을 마련해주는 ‘앨리스(Alice) 프로젝트’, 한때 피해여성이던 자원봉사자들이 전문가 상담 전에 또 상담과 병행해서 그들의 고충을 듣고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힘과 의지를 북돋우는 ‘아미나(Amina) 프로젝트’등을 병행했다. 영국 여성인권그룹 ‘여성을 위한 정의 Justice for Women’의 공동설립자 줄리 빈델(Julie Bindel)은 2008년 가디언 기고문에서 ‘아미나 프로젝트’를 피해여성과 전문가들의 도움을 이어주는 매개 프로그램으로써 런던뿐 아니라 영국 전역과 세계로 확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미나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 여성뿐 아니라 자원봉사자들의 삶도 보상받고 또 변화한다. 그들은 폭력에 대한 이해를 키우고 극복의 기술을 익히며 자신의 삶의 새로운 전망과 지평을 열게 된다. 한 참가자가 표현했듯이 ‘내 안에서 마치 페미니스트의 그것과 같은 뭔가가 포효하듯 깨어나는’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피해자’가 ‘생존자’로, 나아가 조력자로 변화하는 그 과정은 마샬의 삶의 과정이기도 했다. 그는 내무부가 주최한 한 성폭력 컨퍼런스에서 강간 피해자가 사례를 발표하는 동안 여성 전문가들이 분노는커녕 넋 나간 얼굴로 동정하듯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났다고 말했다. 2003년 이후 Poppy 프로젝트를 거쳐간 여성은 약 3,000명. 그 중 1,000여 명이 영국 시민으로 새 삶을 누리고 있다.

영국 최대 여성ㆍ아동 자선단체인 ‘Women’s Aid’에 따르면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일반 폭력범죄는 지난 20년 사이(1995~2014) 약 1/3로 꾸준히 감소한 반면 가정 폭력은 전혀 줄지 않았다. 2013년 현재 매주 약 2명의 여성이 파트너나 전 파트너에 의해 살해 당한다. 2013년 살인사건 피해자 526명 가운데 남성 파트너나 전 파트너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이 46%였다. 여성이 남성 파트너를 살해한 경우는 7%였다. 2012년 한 해 동안 가정 폭력을 겪은 여성은 전체의 약 7.1%였고, 16세 이후 가정폭력을 경험한 여성은 30%에 달했다. 영국 경찰은 30초마다 한 통 꼴의 가정폭력 피해 신고전화를 받고 있다. 이브스가 인용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국의 가정폭력 피해 사회적 비용은 연간 160억 파운드. 부상을 치료(정신과 진료비용은 제외)하는 데만 약 17억 파운드가 든다. 성폭력 강제 매매춘 등을 뺀, 가정폭력 피해만 그렇다.(The Sun 캠페인 ‘give me shelter’자료)

‘Women’s Aid’는 여성 한 명을 6개월간 피난시설에 수용하는 데 드는 비용은 인건비와 시설 운영비 등을 포함해 약 9,600 파운드라고 밝혔다. 영국 정부는 2010년 약 1억 파운드의 예산으로 젠더폭력 피해 여성 구제단체들을 지원했다. 하지만 그 해 집권한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정권은 그 예산을 대폭 삭감하기 시작했다. 2015년 영국 정부의 젠더 폭력 지원 예산은 2010년의 1/4 수준인 2,800만 파운드였다. 이른바 ‘빅 소사이어티(Big Society, Little Government)’정책, 즉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서비스를 정부에만 의존하지 않고 가족과 이웃, 사회공동체가 합심해서 추진함으로써 서비스의 효율을 높이고 작은 정부를 실현한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2010년 187곳이던 영국 젠더 폭력 구제 시설은 지난해 155곳으로 줄었고, 그나마 대부분 극심한 운영난을 겪게 됐다.‘Women’s Aid’는 “지난해 하루 평균 약 112명의 여성과 84명의 아동이 각종 피난 시설을 떠나야 했다”고 밝혔다.

마샬의 이브스와 Poppy 프로젝트도 직격탄을 맞았다. 젠더 폭력은 사회 기부의 가장 변두리 분야 가운데 하나다. 특히 인신매매 피해 여성에 대한 지역 사회의 시선은 위선적인 온정조차 기대하기 힘들 때가 많다. 그들은 용케 범죄집단의 마수를 벗어나더라도 국가의 보호를 받을 자격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합법적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고, 강압에 의한 매춘이었음을 소명해야 하고, 시민들의 세금을 우려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님을 인정받아야 한다. Poppy 프로젝트 활동가 이리나 도 카르모(Irina Do Carmo)는 “(그들은) 불법 이주자일 뿐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우리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라고 썼다(가디언, 15.7.30).

하물며 그들을 돕는 성금이라니. 2010년 이후 연간 지원금과 기부금 수입은 670만 파운드에서 200만 파운드로 격감했다. 마샬은 2011년 인터뷰에서 “가정 폭력 피해자는 시청에 몰려가 도와달라고 시위하는 이들이 아니다. 강간 피해자는 신문사에 찾아가 지역사회의 매정함을 불평하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늘 소수이고, 캠페인이나 로비의 약자다”라고 말했다. 나이지리아 출신 23세 여성 아비케(Abike)가 영국 남성들의 성노예가 되고 공권력으로부터 짓밟히는 기막힌 사연을 지난해 만화와 애니메이션 (https://www.youtube.com/watch?v=o3z4gE2UJ24)으로 제작해 시민들이 보고 느끼게 한 것도 그래서였다.

2013년 ‘The third sector’라는 매체 인터뷰에서 마샬은 “더 이상 줄일 수 있는 비용이 없다. 직원 14명을 잃게 됐고, 폭력 피해여성의 방문 상담ㆍ조언 센터를 폐쇄하게 됐고, 나머지 프로그램도 축소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젠더 폭력 피해 여성은 누구나 그 지역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고, 지역사회는 그들이 회복되는 데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2011년 7월 그는 캐머런 총리에게 편지를 썼다. 제국훈장 반납 사유서였다. “다들 긴축긴축 하는데, 우리에겐 해당사항 없는 얘기다. 왜냐하면 우리는 긴축해야 할 만큼 충분한 예산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강간 피해자에게 돈이 없으니 상담을 절반만 받고 나가라고 말하란 말이냐.”(가디언, 2011.2.15)

그는 “피해 여성에게 필수적인 서비스를 배제한 ‘긴축’청구서를 만들 수 없다.(…) 자격을 갖춘 전문가도 없이 시설을 운영하는 것은, 숫자를 채우려고 최대한 빨리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공장 생산라인을 가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그들을 제대로 돕는 게 아니다. 그들은 누울 수 있는 침대는 얻겠지만, 위험한 처지를 벗어나 각자의 삶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내가 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훈장을,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게 된 뒤로도 계속 지니는 것은 부도덕하고 불명예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고 반납 직후 인터뷰에 말했다.

마샬은 범죄소설 마니아였고, ‘영혼의 암살자 Soul Assassin’과 ‘긴 그림자 The Long Shadow’라는 두 권의 범죄소설을 자비로 출판한 작가였다. “어둡고 새롭고 조금은 자전적인”내용이라고 줄리 빈델은 그의 작품들을 평했다. 파트너 리사가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은 2003년 무렵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 마샬은 “나 같은 ‘생존자’는 상담을 받으라는 말을 늘 듣곤 하지만 내겐 글쓰기와 페미니즘이 최선의 치료법이었다. 픽션 안에서 당신은 당신의 세상을 통제할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바의 세상을 구현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의 삶은 ‘픽션’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해 위암과 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줄곧 투병했다. 빈델은 병석의 그가 “할 일이 아직 많다”고 했다고, “레즈비언들을 위한 안전한 거처를 마련하고 싶고, 무엇보다 먼저 이 비정한 정부를 쫓아내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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