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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Why] "자식 같은 벼가 다 시들어… 평생 이런 가뭄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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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충남 지역 강수량 평년의 절반에도 못미쳐

벼 수확할 시기 놓쳐 이젠 비가 와도 소용없어

작은 저수지 몇개만 더 만들었어도 예방 가능

조선일보

"예전에는 가뭄이 들어도 천재지변이니 하늘만 원망했지. 지금은 작은 저수지 몇 개만 더 있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테니까, 그게 아주 절망스럽지."

지난 7일 오후 충남 서산시 부석면사무소에서 만난 농부 이종선(67)씨는 "평생 처음 겪어보는 가뭄"이라고 말했다. 올해 초부터 계속된 가뭄으로 벼가 말라 죽거나 염분이 타고 올라와 붉게 변한 상태라고 했다. 올 들어 지난달 30일까지 대전·세종·충남 지역의 누적 강수량은 522.6㎜로 평년의 46.7% 수준이다. 표준강수지수(SPI6)를 적용하면 천안·서산·부여 지역은 '극한 가뭄'에 속한다.

"비가 와도 이젠 소용없다"

―가뭄 피해가 어느 정도인가.

"서산 천수만지구는 간척지라 비가 안오면 땅속에 있던 염분이 올라온다. 농민마다 다르지만 경작지의 30~100%씩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소작농들은 더 심각하다. 소작농들은 연초에 농협에서 빌린 돈으로 논 소유자에게 돈을 내고 대신 그해 수확물을 가져간다. 농사를 망치면 소작농은 수확물도 잃고 빚도 지게 되는 거다."

―앞으로 비가 오면 상황이 좀 달라지지 않나.

"이제는 비가 와도 소용없다. 수확을 할 때 물이 남아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보통 9월 25일쯤 논에서 물을 떼고(물 공급을 중단하고) 논을 말렸다가 10월 15일쯤 수확을 한다. 지금 비가 온다 해도 논을 말려서 수확할 시기가 이미 지나 있을 때라 의미가 없다."

―예전 가뭄과 비교하면 어떤가.

"올해 가뭄이 가장 심하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농사짓던 50년 전도 가뭄이 있었지만 저수지가 많아지면서 웬만한 가뭄은 견뎌왔다. 그런데 올해 가뭄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예전에는 관개시설이 발달하지 않아서 농사를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작은 소류지라도 몇 개 더 만들어서 예방할 수 있었는데 못 했다는 생각 때문에 유독 뼈아프다."

―올해 농사를 망치면 내년 농사는 어떻게 짓나.

"그동안 모아놨던 돈을 꺼내 쓰거나 빚을 져야 한다. 그조차 할 수 없으면 빚을 진 채 농사에서 손을 뗀다. 사실 자연재해가 없어도 농사로는 돈 벌어먹기 힘들다. 예전에는 4000평이면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하다고 했으나 요새는 만 평은 돼야 겨우 생활비를 번다고들 한다. 쌀값이 워낙 많이 떨어졌다. 시골이라 다들 집이 있고 생활비가 적게 들어 그렇지 소득 자체는 얼마 되지 않는다."

조선일보

지난 8일 충남 서산시 천수만 간척지에 있는 자신의 논에서 이종선씨가 가뭄으로 말라 쭉정이만 가득한 벼를 들어 보이고 있다. / 신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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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식이 가뭄에 시드는 기분"

이씨는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는 농사를 짓고 있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농사를 익혔다. 어려서부터 쟁기와 삽을 쥐기 시작했다. 6남매의 장남으로 벼농사로 15세 아래 막냇동생까지 결혼시켰다. 그는 "몇 번 농사를 그만둘 기회가 있었지만 어느 순간 다시 농사꾼의 자리로 돌아와 있더라"고 했다. 태풍이나 가뭄 피해를 당할 때마다 "왜 농사를 지어서 이 고생을 하나" 싶다는 이씨는 "다시 태어나도 농사를 지을 것"이라고 했다.

―예전보다 농사일은 좀 편해졌나.

"요새 농민들은 '구두 신고 농사짓는다'고 말한다. 워낙 기계화되다 보니 논바닥에 발을 디딜 일이 없다는 뜻이다. 손으로 하는 작업이 사라지고 모심기부터 수확까지 기계로 다 하다보니 육체적 노동 강도는 약해졌다. 하지만 농사는 여전히 골치 아픈 일이다. 수확량을 늘리려면 머리를 쓰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어떻게 공부하나.

"농사란 게 다 때가 있다. 적기를 맞추기 위해 데이터를 축적해야 한다. 작년에 내가 몇 ㎏의 약을 줬는데 이 정도로 자랐더라, 모를 언제 심었더니 이런 현상이 나타나더라, 농사를 하다 보면 데이터가 생긴다. 그래서 보통 농사일을 처음 하는 초보자의 수확량은 베테랑 농사꾼의 반절이다. 농민들 말로 '육두문자를 심는다'고 한다. 제멋대로 심는다는 거다. 오늘 심어야 할 모를 내일 심는다든지, 일주일 뒤에 약을 준다든가."

―그런 농사를 망칠 때 기분은 어떤가.

"농사는 자식을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 새벽에 들에 나가면 밤새 모가 조금씩 자란 모습을 보고 희열을 느낀다. 올해는 벼가 다 시들어 논으로 잘 안 가게 된다. 벼가 자식인데 자식이 시드는 걸 보는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나."





[서산=성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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