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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엠디팩트] 프랑스 지중해 무역중심 ‘마르세유’ … 내란을 막으려는 두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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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니콜라스요새·생장요새·이프섬 등 기괴한 풍경 연출 … 노트르담대성당과 마조르대성당, 성빅토르수도원도 건재

지난해 9월 24일 마르세유 지하기차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니 소낙비가 한창이다. 이 곳은 올드포트(Old Port, 구항)역은 다양한 버스 노선의 중심지다. 도시가 생각보다 작기 때문에 어디를 가려면 웬만하면 이 곳으로 되돌아와서 가야 한다. 항구는 비에 젖고 부랴부랴 숙소(Le Petit Nice Passedat)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숙소에 가방을 놓고 가장 먼저 가본 곳이 파로궁(Palais du Pharo)과 인접한 파로공원이다. 19세기에 나폴레옹 3세가 황후 외제니(Eugenie)를 위해 지었다는 이 궁전은 G20 정상회의가 열렸고 각종 회의장 등으로 쓰인다. 한번 들어가려니 관계자(행사 준비자나 참석자)가 아니면 힘들다며 경비가 고개를 단호하게 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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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궁 맞은 편 언덕에 성니콜라스 요새(Fort Saint Nicolas)가 있다. 먼바다에서 적들이 쳐들어오면 이 곳 요새로 모여 대항했다고 한다. 성니콜라스요새 밑으로 해안도로가 나 있고 좁은 바닷길을 건너 보이는 곳이 생장요새(Fort Saint Jean)다. 지중해에서 이 바닷길을 타고 아주 짧은 거리에 올드포트가 있다.

마르세유의 옛 이름은 마살리아(Massalia)이다. 프랑스에 첫 정착한 그리스인인 리구리언(Ligurian)들이 지은 지명이다. 지금의 마르세유는 기원전 600년경 소아시아 에게 해변의 포카(Phocaea, 지금의 Foca로 터키의 일부)에서 온 식민지인에 의해 건설됐다.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춘 작은 만은 자연스레 그리스의 식민지로 지중해 무역의 거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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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는 로마제국이 쇠퇴할 8세기 무렵까지 로마의 지배를 받았지만 안정적인 지리적 위치에 상원의원에 의한 민주적 자치공화정을 통해 강압적인 지배에선 벗어나 있었다. 줄리어스 시저가 폼페이 및 상원세력과 맞설 때 당시 단합된 힘으로 로마와 대적하면서 시저의 스페인 정복길을 가로 막았다. 물론 기원전 49년에 퇴패하긴 했지만 이후에도 자치정부를 유지했다. 오히려 로마의 위력에 힘입어 무역중심지로 부상했다. 이후 상승세를 보이다가 6세기에 무역의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중세에는 십자군 원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프로방스의 군주 킹 르네(King Rene)의 지배를 거쳐 15세기에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됐다.

1660년 마르세유를 장악한 프랑스 왕정은 한시도 감시의 눈을 떼지 않았다. 마르세유 시청의 파사드에는 이 도시 출신의 피에르 퓌제(1620~1694)가 조각한 루이14세가 아직도 의심 많은 시선으로 항구를 바라보고 있다. 반란의 냄새가 나는 세력을 감시하기 위해 루이14세가 세운 게 바로 생장요새와 성니콜라스요새인 것이다. 올드포트 입구를 지키는 이들 두 요새는 외적으로부터 마르세유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내란을 예방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하다. 포문이 바다가 아니라 도시를 향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생장요새는 17세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됐다. 12세기 성요한 호스피탈기사단(Knights Hospitaller)의 사령부가 있었고 15세기(1447~1453)엔 르네왕이 타워를 세웠는데 이들이 합쳐진 형태다. 호스피탈기사단은 1046년 무렵 창립됐으며 성지 예루살렘 순례자를 치료하고, 십자군 전쟁의 부상자를 수용했다.

자유를 갈망하는 마르세유의 정신이 기치를 올린 것은 프랑스혁명 때였다. 분연히 일어선 500여 명의 의용군은 파리까지 행군하는 동안 목청을 드높여 ‘가자 조국의 아이들아. 영광의 날이 왔다’라는 노래를 불렀다. 시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줬던 마르세유 의용군의 노래는 현재 프랑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가 됐다.

마르세유는 근대에 접어들어 프랑스의 지중해 무역 중심지로 성장했다. 산업혁명, 수에즈운하 개통,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 등에 힘입어 오랫동안 번영을 누려왔다.

성니콜라스요새를 나와 부랴부랴 마르세유에서 가장 크고 높은 곳에 위치한 노트르담대성당(Basilique Notre-Dame-de-la-garde)을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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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대성당에선 남쪽으로 지중해가 보인다. 이 곳은 성빅토르수도원, 성마리아마죄르대성당(Cathedrale Saint-Marie-Majeure) 등과 함께 지역의 주요한 종교 건축물로 꼽힌다. 석회암 언덕 위에 세워진 노트르담대성당은 본래 13세기 예배당과 프랑수아1세(Francis I, 1494~1547)의 명으로 세워진 16세기 요새 건축물이 있던 자리였다. 현재의 모습은 1853~1864년에 진행된 공사의 산물이다.

노트르담대성당의 상단은 완전한 신비잔틴 양식 건물로 거대한 돔과 줄무늬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측면에는 높이 40m에 달하는 사각 종루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종탑 꼭대기에는 머리에 관을 쓰고 아기 예수를 안은 11m 높이의 황금색 성모 마리아상이 세워져 있다. 예배당 내부는 황금색 종교화와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 채색 대리석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졌다.

노트르담대성당에서 내려와 향한 곳이 17세기에 세워진 구 자선원(Vieille Charite)이다. 부랑자나 고아들을 수용하던 곳이다. 프렌치 바로크 스타일의 거대한 석회석 건물에 400여 명의 고아들이 공동생활을 했던 큰 규모의 자선시설이었다. 부자들의 기부금으로 자선원을 운영할 만큼 마르세유는 부유했다. 지금은 전시회 등이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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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원 주위 거리는 오토바이 폭주족이 난무한다. 지갑을 날치기하지 않을까, 떼강도처럼 달려들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폭주족은 다수가 북아프리카계 아랍인인 듯하다. 이민 와 가난하게 살며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불만을 폭주로 시위하는 것 같다. 가끔 경찰차가 사이렌 소리를 울며 단속에 나서지만 좁은 골목길로 도망치는 그들을 잡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자선원에서 지름길인 골목길을 가로지르니 바닷가(올드포트)오에 가까운 성마리아마죄르대성당이 나온다. 간단하게 ‘마조르대성당(Cathedrale de Major)’이라 부르기도 한다. 노트르담대성당보다 더 크고 신 비잔틴 양식과 신 로마네스크 양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줄무늬 장식이 화려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본래 5세기엔 예배당이 있던 자리였다. 1852년에 시작된 대규모 성당 공사는 1896년이 돼서야 끝났다. 정면 하단에는 아치형 문이 나 있다. 그 위의 여러 개에 작은 아케이드 각각에 성인 조각상이 하나씩 놓여 있다. 입구 양쪽의 사각 탑 꼭대기와 제단을 장식하고 있는 크고 작은 돔 지붕들도 인상적이다. 마르세유 주교들의 지하 묘와 돔 안쪽의 아름다운 천장 문양을 관람할 수 있다. 1906년 대성당은 웅장하고 뛰어난 건축미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됐다. 이곳은 1948년까지 교구에 속하다 승격돼 이후 대주교의 관할구(Archdiocese)가 됐다.

마조르대성당에서 더 항구 중심으로 걸어나오면 2013년에 완공된 유럽지중해문명박물관(뮤셈, Mu-CEM, Musee des civilisations de l’Europe et de la Mediterranee)이 나와 있다. 뮤셈은 본격적인 유럽 지중해 문명의 역사를 다루는 최초의 박물관이자 지방에 위치한 프랑스 최초의 국립박물관이다. 그리스·로마 시절부터 마르세유 항구의 입구를 지켜왔던 생장요새와 과거 여객터미널이었던 J4지구에 걸쳐 건설됐다. 현재 각종 박람회나 컨벤션, 전시회가 열리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조그만 쇼핑센터도 들어서 있다. 앞에는 대형 크루즈 선박이 정박해 여행객이 타고 내리게 돼 있다.

유서깊은 생장요새 옆에 뮤셈이 들어선 것은 신구의 조화라고나 할까. 다시 한번 지중해시대를 갈망하는 마르세유 사람들의 염원이 담겼을 것이다.

올드포트 앞은 ‘ㄷ’자 모양으로 꺾여 있다. 이 중 서편의 식당은 조금 음산하고 관광객도 상대적으로 적고, 유명 레스토랑으로 알려진 곳이 있으나 음식 가격이 비싸다. 중심의 올드포트 앞 버스정류장을 지나 동편의 서민적인 식당가로 옮겼다. 비교적 푸짐한 해물세트와 달달한 전체 샐러드, 쇠고기와 감자칩을 시켰다. 시장기가 돌아 더욱 맛있다. 화이트와인도 한병 하니 취기가 돈다. 그런데 버스가 끊겼다. 오후 9시만 조금 넘어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결국 1시간 동안 거의 3.5㎞를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파로궁을 끼고 도니 해변가에 즐비한 별장과 고급호텔에는 파티하는 불빛이 아름답고 흥겨운 사람소리가 난다.

다음날 아침 예정보다 늦게 일어난 우리는 숙소에서 짐을 챙기고 올드포트에서 출발하는 이프·프리울(If, Frioul)섬에 가는 여객선을 탔다. 해변에서 3㎞ 가량 떨어진 이프섬에서 조금 더 가면 프리울섬이다. 풍랑이 치거나 겨울에는 정박시설이 허술한 이프섬에 정박하기 어려워 프리울섬만 들렀다오는 경우가 태반이다. 필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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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섬의 이프성채는 프랑수아 1세에 의해 섬의 절벽 위에 만들어졌다.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배경으로 묘사돼 유명해졌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에드몽 당테스는 연적과 시기하는 사람들의 모함으로 14년간 이프섬(몽테크리스토섬)에 갇혔다가 탈출해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변신해 죽음으로 복수한다. 결말은 아들처럼 여기는 막시밀리앙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넘겨주고 사랑하는 수양딸 에데와 멀리 떠나는 해피엔딩이다. 다소 스토리가 변형된 ‘암굴왕’의 원작이 바로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다.

프리울섬은 생각보다 컸고 바위가 많고 척박했다. 로마시대에 지어졌다는 성벽이 섬의 등성이에 놓여 있다. 고집대로 섬 끝까지 갈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중간에서 돌아섰다. 선착장으로 서둘러 돌아갔는데 왕복여객선은 이미 항구를 떠나 한참을 가고 있다. 다음배가 오려면 40여분이 필요하다. 결정이 빨라야 했는데 결국 뱃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이날 아침 마르세이유 시내관광에서 보려던 롱샹궁, 칸비에르거리, 개선문,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포기해야 했다.
롱샹궁을 놓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아를과 아비뇽으로 향했다. 각각 ‘고흐가 사랑한 도시’와 ‘교황이 피신해온 도시’로 예술가와 순례자에겐 꼭 가보고 싶은 도시다.

취재 = 정종호 엠디팩트 기자 md@mdfa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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