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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엄마·아빠 앨범에서 보았던 그 불국사, 수학여행 1번지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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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동작 봐라. 자, 남학생은 뒤로 가고, 여학생은 앞에 앉는다. 떡진 머리는 잡아준다.”

최순옥 경주시 문화관광 해설사(56)의 목소리는 거침이 없다. 그가 카메라 앞에서 “다 같이 큰소리로 엄마 사랑해 하자”고 외쳤다. 혹시 했지만 아이들의 표정에는 역시 변화가 없었다. 최 해설사가 다시 “다 같이 1박2일”하고 소리쳤다.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더니 “파이팅”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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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여전히 수학여행 일번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추억의 ‘포토 존’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 앞을 학생들이 재잘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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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 1번지, 경주 불국사에 가면 누구나 ‘그 자리’에서 똑같은 포즈로 단체 사진을 찍는다. 1970년대부터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주인공만 달라졌을 뿐 똑같은 ‘의례’를 거친다. 많은 이들이 불국사 청운·백운교 앞에서 찍은 사진 한장쯤 간직하고 있는 배경이다.

서울에서 경주로 2박3일 졸업여행을 온 초등학교 6학년생 50여 명도 마찬가지였다. 1반 아이들이 우향우하고 떠나자 2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담임선생님은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며 ‘치즈~’를 외쳤다. 불국사는 그렇게 변함없이 아이들을 받아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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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옛날 여관단지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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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복을 입고 나타난 어른들

아이들을 따라 불국사 안으로 들어섰다. 변함없이 돌계단을 오르니 극락전이 나왔다. 강원도 원주에서 수학여행을 왔다는 6학년 남학생이 대뜸 “황금돼지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하고 물었다. 2007년 극락전 현판 뒤에서 발견된 목조황금돼지를 말하는 거였다. 옆에 있던 아이가 “소원을 빌면 복이 온대요”라며 보물을 찾으러 가자고 했다. 극락전 처마 밑에서 합장하는 백발의 할머니들이 눈에 띄었다. 흩어졌던 아이들도 일렬로 줄을 섰다. 임진왜란 때 훼손됐다가 조선 후기 재건된 극락전 현판 뒤에 누가, 왜 목조황금돼지를 숨겨두었는지 설은 많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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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출입이 금지된 청운교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여고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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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수 중인 석가탑에서 만난 여학생이 퀴즈를 맞혀 선물로 받았다며 경주빵을 내밀었다. 황남빵 브랜드를 쓰지 못해 생겨났다는 경주빵이었다. 아이들은 불교문화의 정수이자 세계문화유산인 불국사를 공부하는 것보다 친구들끼리 재잘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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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주어진 2시간의 자유가 끝날 무렵 50~60대로 보이는 어른들이 검정 교복을 입고 나타났다. 조금 전 아이들과 똑같이 바로 그 자리에서 단체 사진을 찍더니 다보탑 앞에 모여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깔깔대며 웃었다. 지금은 한 반 인원이 25명이지만 옛날에는 60~70명이 보통이었다. 인솔자는 담임선생님뿐이어서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옛날을 추억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너희처럼 어렸을 때 우리도 경주로 수학여행을 왔었지.” 까만 교복 치마를 입은 어머니들이 손주 같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라문화원 진병길 원장(52)은 “전국 초·중·고 동창생들이 추억의 수학여행을 단체로 오는 경우가 많다”며 “교복을 입으면 나이와 상관없이 학창시절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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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곱을 떼며 오르던 석굴암 가는 길

석굴암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밝다. 요즘은 걷지 않고 차로 이동한다. 구불구불 10㎞ 정도를 전용 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데 10분 정도 걸렸다. 주차장에서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석굴암이 나왔다.

1970년대만 해도 경주로 수학여행을 오면 한국관, 신라장, 서울장 등 불국사앞 대형 여관에서 2박3일을 묵었다. 다음날 석굴암에서 일출을 보려면 새벽 4시에는 숙소를 나서야 했다. 바로 옆 친구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산길을 1시간여 힘겹게 올랐다. 아이들은 왜 이 고생을 시키느냐며 입을 삐죽거렸다. 밤을 꼬박 새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 방에 20~40명씩 배정받은 악동들은 밤이 되면 더욱 신났다. 손전등을 턱 아래에 대고 귀신 놀이를 하다가 이내 베개싸움을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베개를 던지다 한 친구가 옆방으로 도망가고 전교생의 베개 싸움으로 번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방 저방 뛰어다니며 놀이의 절정에 이를 때쯤 꼭 호랑이 선생님이 나타난다. “불 끄고 빨리들 안 자!” 몽둥이를 들고 불호령을 내려야 베개싸움은 끝이 났다. 이어지는 진실게임에선 흠모하는 선생님을 털어놓았다. 친구의 얼굴에 매직펜으로 낙서를 하고, 선생님 신발에 치약을 가득 넣고 나서야 장난기가 수그러들었다.

전쟁 같은 첫날 밤을 보냈으니 새벽 산행이 쉬울 리가 없었다. 석굴암에 도착해서도 졸음은 가시지 않았다. 일출을 보러 가는 길은 극기훈련이나 다름없었다.

석굴암으로 향하는 안개 낀 숲은 여전했다. 넓은 흙길과 하늘로 치솟은 소나무들은 건강했다. 다 왔다 싶을 때 마지막 2분여 가파르게 올라야 하는 돌계단도 그대로였다. 석굴암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토함산을 배경으로 바위에 올라 사진을 찍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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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마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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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동마을 산책

포항제철소를 거쳐 안동으로 떠난다는 아이들을 따라 경주의 마지막 수학여행지 양동마을로 갔다. 2010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마을은 요즘 수학여행의 인기코스다. 500년이 넘은 기와집을 따라 나지막한 돌담길을 지나니 온통 연꽃밭이었다. 할머니가 집 앞마당에 나와 백구를 불렀지만 개와 고양이는 노느라 들은 척도 안했다.

마을 가장 남쪽에 자리한 조선시대 한옥 관가정(觀稼亭)으로 올랐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처럼 자식들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라고 했다. 누마루에 올라 보니 곡식이 익어가는 가을 들판과 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책에서 본 대로 소박하고 조용한 ‘살아있는 한옥 박물관’이었다.

아이들은 역사를 암기하지 않고 체험했다. 조선시대 예의범절을 배우면서 떡메치기 등도 직접 해봤다. 세담투어 김영기 대표(50)는 “요즘은 전 학년이 단체로 오지 않고 반별로, 팀별로 수학여행을 온다”고 말했다. 경주는 예나 지금이나 고색창연했고, 추억을 만드는 아이들로 시끌벅적했다.

◆추억의 경주, 지금의 경주

-여관 대신 리조트·유스호스텔 이용-

-야경·테마파크 등 체험 프로그램 다양-


■ 비둘기호에서 KTX까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려면 7~8시간씩 열차를 타야 했다. 지금은 사라진 비둘기호 임시열차 8량을 이용했다. 선풍기가 있었지만 더우면 위아래로 열리는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기도 했다. 열차의 전기시설도 낙후해 터널을 지날 땐 객실도 캄캄했다. 경주역이나 불국사역은 시골 간이역처럼 작았고, 숙소인 대형 여관까지는 걸어서 가야 했다.

지금은 KTX를 타고 신경주역에 내린다. 서울에서 2시간 거리로 가까워졌다. 대신 역에서 시내까지가 멀어져 택시를 이용하면 2만원 나온다. 밤 10시까지 운행하는 일반 버스 요금은 어른 1200원이다.

■ 경주 찍고 포항·안동으로

불국사와 석굴암, 천마총 등은 지금도 경주 수학여행의 기본 코스다. 첨성대와 월지(옛 안압지)도 빼놓을 수 없는데 요즘은 야경을 보기 위해 ‘달빛 기행’을 떠난다. 소원을 적은 8각 백색등을 들고 분황사와 무열왕릉을 1~2시간 걷는다. 테마파크도 인기다. 최근 버드파크와 동궁원을 많이 찾는다. 버드파크에선 펭귄, 새끼 타조 등 250종 2000여 마리의 새를 볼 수 있다. 동궁원 ‘주요 식물 24 스탬프’ 프로그램은 아이들을 갖가지 식물세계로 이끈다.

불국사 등 입장료는 어른 기준 2000원이고 주차비는 1000~2000원이다. 달빛 기행은 1인 2만원, 교복을 입고 떠나는 추억의 수학여행은 2박3일 일정에 1인 10만~13만원이다.

교통이 편리해져 경주에서 1박하고 포항제철소와 울산 현대차 공장을 견학하는 경우가 많다.

■ 여관보다는 리조트

수학여행 온 학생들은 주로 토함산 자락 불국사앞 대형 여관인 한국관, 신라장, 청산여관 등에 묵었다. 이동 중 점심을 사 먹을 수가 없어 여관에서 나뭇결 모양의 종이도시락에 보리밥을 싸주었다. 반찬은 계란말이와 노란 단무지였다. 간식은 삶은 달걀과 콜라, 사이다 등 탄산음료가 최고였다. 큰 방에는 보통 40명씩 들었다.

요즘은 리조트에서 숙박한다. 한화리조트 경주의 경우 스프링돔 온천 워터파크와 치즈&피자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이 인기다. 100명 이하 2박3일 일정으로 찾는데, 패밀리형 31평엔 보통 7~8명 정도가 투숙하며 저녁 만찬으로 뷔페식사를 한다.

대형 여관들은 유스호스텔로 이름을 바꿔 영업 중이다. 4~6인실은 TV와 냉장고, 개별 화장실을 갖추고 있다. 한꺼번에 450명 수용이 가능한 대형 식당에선 장기자랑이 펼쳐진다. 주중에는 단체 수학여행단 때문에 일반인은 이용할 수 없다. 유스호스텔은 주말 6만원이고 인근 펜션은 10만원선이다.

<경주 | 정유미 기자 youm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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