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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신율의출발새아침] 산케이 '민비' 망언 "자학사관 극복위한 파렴치한 역사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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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신율의 출발 새아침]

히스토리 인 뉴스 :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제연구소 교수

◇ 김우성 PD(이하 김우성): 박 대통령의 방중을 보는 일본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곱지 않은 게 아니라 아주 무례합니다. 급기야 일본의 우익언론 산케이 신문이 박대통령을 명성황후에 비유하며 조선 말기와 같은 사대 외교를 보여주고 있다는 독설을 쏟아놓았죠. 일본의 일그러진 역사인식,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또 다시 기가 막힌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문제 좀 자세히 짚어보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역사의 눈으로 뉴스를 읽어보는 시간이죠. 히스토리 인 뉴스, 오늘도 역사학자 전우용씨 스튜디오에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십니까?

◆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제연구소 교수(이하 전우용): 네, 안녕하세요.

◇ 김우성: 우선 명성황후, 민비 등 여러 호칭이 있습니다. 이걸 좀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 전우용: 조금 뜨거운 문제인데요. 사실 조선시대 역대 왕후를 지칭할 때 인현왕후, 대왕대비 조씨, 이런 식으로 쓰지 않습니까? 이분은 왕후일 때 돌아가셨고, 장례를 치를 때 명성황후로 추존되었죠. 그래서 어떻게 호칭하는게 정확하다는 정답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해당할 당시에는 그냥 왕후였고요. 일본인들이 흔히 민비라고 불렀기 때문에 민비라는 호칭에 거부감을 가진 분들도 많죠. 그런데 굳이 명성황후라고 불러야 정확한 표현이고, 민비라든가 민왕후라고 부르면 옳지 않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 김우성: 민비라는 호칭이 비하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 전우용: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고요. 숙종비도 인연왕후 민씨였고요. 민비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 김우성: 그렇군요. 참 역사적으로 아픈 문제이기도 합니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의 전말을 볼 텐데요. 명성왕후 시해사건, 어떻게 진행되었죠?

◆ 전우용: 그 당시 기록들, 일본 측의 상세한 조사에 의하면 먼저 새벽에 당시 대원군이 공덕동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죄를 뒤집어씌울 사람을 먼저 구한 거죠. 공덕동에서 대원군을 데리고 대원군 일파의 한국인 무사 몇 명하고 일본 나인들하고 일본 군인이 같이 경복궁으로 들어간 거죠. 실질적인 왕후시해는 한국 일부 무뢰배들이 길 안내를 해준 거죠. 그리고 일본 나인들이 같이 들어가서 경복궁 건천궁 뒤쪽 옥호루라는 곳에 왕후가 계셨는데, 그곳일대를 샅샅이 뒤져가면서 왕후를 찾아낸 거죠. 왕후는 그 전에 임오군란 때의 경험도 있고 해서 평복을 입고 있었다고 하는데, 찾아내서 살해를 했는데요. 시해과정에 대해서는 워낙 여러 가지 소문들이 있었고,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나중에 박은식 선생의 한국통사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대로, 그냥 시해한 것도 아니고 여러 명이 윤간을 하고 산채로 태워 죽였다는 말도 있는데요. 어느 정도 선에서 사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김우성: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역사적인 아픔입니다. 일본이 이런 일을 저지른 것, 사실 테러 아닌가요? 끔찍한 테러인데요.

◆ 전우용: 그냥 테러라고 볼 수는 없죠. 이건 있을 수 없는, 전 세계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죠. 일반 외국 정부요인을 몰래 암살한 것도 아니고, 한 나라의 왕후를, 궁궐에 직접 들어가서 처참하게 살해했다는 것은 당시 문명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어느 나라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범죄였죠.

◇ 김우성: 이런 일까지 저지른 배경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명성왕후가 당시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면서 국제정세를 이용하려는 측면도 있었는데요.

◆ 전우용: 그보다도 사실 고종을 놓아두고 왜 왕후였는가도 따져봐야 하는데요. 실제로 고종이 친정, 20살이 되면서 직접 정치를 하면서 자기 생부였던 대원군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서 애를 썼고, 그러다보니까 활용할 수 있는 정치적 자원이 처갓집 자원이었거든요. 그러면서 민 씨 일가가 득세를 한 측면이 있고요. 이 사람들이 청일 전쟁 이전까지는 주로 현상유지정책을 펴면서 친청반일의 입장에 서 있었는데, 청일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한반도 전역에 영향을 행사하니까 본인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는 것도 흔들리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나라가 다시 일본에 그늘 아래 들어갈 위기에 처해있다는 생각, 이런 것들이 있어서 그걸 만회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여서 이른바 삼국간섭이라는 것을 이끌어냈죠. 그러니까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얻은 전리품 중에 요동반도 할양이라는 것을 포기시킨 거죠. 더불어서 이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도 당장은 포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니까, 이런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러시아를 끌어들여서 일본을 견제하는 정책을 파탄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정책의 핵심담당자인 고종을 협박하기 위해서 왕후 살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 김우성: 일본은 적반하장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사대주의’라는 표현을 썼어요. 또 일각에서는 명성왕후를 균형외교라고 말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사대주의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전우용: 사실 이소사대라는 말이 조선 초기에 명문화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이데올로기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상대할 때 생존 전략으로 큰 나라에 대해서는 예의를 갖춘다는 뜻이었는데요. 일본인들이 조선사를 왜곡하면서 사대주의라는 말을 만들어 낸 거죠. 조선이라는 나라가 지정학적으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 붙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라이다. 그래서 기질적으로 조선인들은 큰 나라에 빌붙는 비굴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식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유포시킨 것이 대략 19세기 말부터였어요.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 인 것이고요. 만약 명성왕후나 고종의 정책을 사대주의라고 평가하려면, 일본이 이겼으니까 일본한테 순응해야죠. 일본이 청나라를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몰아내려고 했다는 것은 사대주의라고 평가할 상황이 아니라는 거예요.

◇ 김우성: 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사이에서의 균형외교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 이렇게 볼 수 있겠는데요. 명성왕후 시해사건, 그 자체로도 기가 막힌 일입니다만 이를 두고 일본에서는 흑색선전이 있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날조된 이야기를 한다는 건데요.

◆ 전우용: 애초에 시해사건을 저지르기 위해서 대원군을 찾아갔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왕궁침입 및 왕비 살해의 책임을 대원군에게 다 뒤집어씌우고자 하는 것인데요.

◇ 김우성: 이미 명성왕후와 대원군은 사이가 아주 안 좋았으니까요.

◆ 전우용: 원래 안 좋았죠. 서로 상극관계였고요. 임오군란 때도 왕후가 실종된 거죠. 시신도 찾지 못했는데 대원군이 사망을 선포하고 장래를 치렀어요. 사실 을미사변이 일어났을 때도 시골 지방에서는 왕후가 안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죠. 어쨌든 대원군 일파에게 뒤집어씌우고 한국 내의 정변으로 포장하려고 했던 것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흑색선전 인 것이죠. 기본적으로는 한국인들 사이의 정변으로 꾸며서, 이게 워낙 큰 국제적 범죄이기 때문에 국내에 있던 외국 사절단에게는 이게 한국인들 사이의 갈등으로 일어난 사건이지, 일본이 개입한 것은 아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펼쳤죠.

◇ 김우성: 교묘하게 가해자를 숨기기 위해서 내부 갈등처럼 끌고 갔는데요. 영화로도 나왔지만 앞서 임오군란에서는 호위무사가 들쳐 업고 장호원까지 피했다. 이런 것을 영화에서도 봤는데요. 일본에 의한 시해 때도 실제로 살아있었다는 소문과 외교문서가 있었다고 해요.

◆ 전우용: 독일에서 얼마 전에 발견되었어요. 왕후가 실제로는 살아있다는 첩보가 있다고 해서 이게 국내 언론에도 크게 보도가 되었었죠. 꽤 오래된 일인데요. 2008년인가요. 그때도 산케이신문 기자 두 분이 저를 찾아온 적이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건 가지고 저한테 들이밀었냐면, 1904년에 당시 고종이 머물던 덕수궁, 당시에는 경운궁이었죠. 경운궁이 전소되는 큰 화재가 났어요. 대체로 많은 사람이 짐작하기를 러일전쟁 나고 나서 일본군이 경운궁 일대를 수색하기 위해서 불을 질렀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와서 독일에서 고종이 직접 불을 지른 것이다, 자작극이라는 자료가 발견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된 건지 내용을 들어보고 나서 제가 그렇게 이야기를 했죠. 이 첩보의 입수 루트가 뭐냐? 일본 쪽에서 조사를 해봤느냐? 그랬더니 사실 일본이 당시 국내에 들어와있던 외교관들을 상대로 상당히 치열한 첩보전을 했고요. 그런 것들 중에는 이런 역선전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까 명성왕후를 일본이 죽였다는 이야기를 외교관들이 접해서 다 본국에 첩보를 타진할 것 아닙니까? 그런 와중에 일본 외교관들이 거짓말을 퍼트리는 거죠. ‘아니다, 살아있다’, ‘아니다, 이건 대원군이 직접 한 짓이다’ 이렇게 역선전을 통해서 국제 여론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역선전을 유포시켰고요. 이런 것들이 여과 없이 본국으로 전송되어서 자료로 남는 경우가 있던 거죠. 그래서 얼마 전에 발견되었던, 명성왕후가 을미사변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라는 식의 외교문서가 독일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해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 김우성: 일본의 악의적 의도를 가진 거짓말이 돌고 돌아서 그런 이야기까지 나온 것이군요. 한 나라의 안주인을 살해했습니다. 대원군을 이용했고 고종황제에게도 압박을 가했을 텐데, 실제로 명성왕후 시해를 통해서 일본이 얻은 효과가 있었습니까?

◆ 전우용: 영향이 크게 미쳤죠. 그 사건 이후에 고종은 거의 밤잠을 자지 못했어요. 그리고 여기 들어와 있는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부탁해서, 미국인들까지 죽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이 사람들이 권총을 들고 고종의 숙소를 돌면서 직접 경비를 섰다는 회고가 많이 남아있죠. 무엇보다도 이 사건 이후에 일본이 국적(國敵)이란 인식이 굉장히 높아졌죠. 을미사변 직후부터 전국적으로 반일의병운동이 일어났고요. 고종도 당시 일본군이 점령했던 경복궁에서 탈출해서 아관파천이라고 하죠. 국가적으로는 조금 모욕적이지만 외국 공사관에 들어가서 정국을 반전시킨 거죠. 그래서 일본에 협력했던 혐의가 있던 대신들을 전부 역적으로 몰아서 처단하고, 외교정책을 가급적이면 중립화로 가는, 이런 형태로 외교정책이 바뀌고, 국내적으로도 조선이 야만국취급을 받기 때문에 이런 모진 일을 당했다고 해서, 문명근대화를 끌어들이기 위한 개혁정책이랄까요. 이런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고요. 그래서 정치적인 파장은 굉장히 컸고요. 민간에서도 잘 아시다시피 백범 선생이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고 일본인을 테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요.

◇ 김우성: 일본이 명성왕후 시해를 비롯해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것, 도대체 왜 이런 걸까요?

◆ 전우용: 왜 이렇다기 보다도, 일단 시해사건 자체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정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것이었고요.

◇ 김우성: 지금까지도 그런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 전우용: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의 야만적 행위들이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나라 의병 진압할 때도 굉장히 야만적이었고요. 이후에 중국에 들어가서 남경대학살이나 간도나 만주에서 한국 동포를 괴롭힐 때도 정말 야만적이었거든요. 그 점 전체에 대해서 2차 대전 이후에 반성의 기류가 있었어요. 그래서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으로 위치를 바꾸기 위한 반성적인 움직임이 몇 십 년 반복되다가, 일본 경제가 세계 굴지의 수준으로 성장한 자신감이 한쪽에 있었고요. 또 한쪽에는 그 이후에 겪은 장기불황 속에서 일본국민들의 불만이 있다 보니까 90년대부터 일본사회에 그런 이야기가 일부 나오기 시작해서, 요즘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것과 흡사한데요. 우리는 왜 일본의 역사를 잘못된 것만 기억하느냐? 자학사관이라는 말을 시작하죠. 자학사관을 극복하고,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들을 중심으로 기억해서, 일본의 미래세대를 떳떳하고 당당하게 키우자, 지난 번 8.15 때 아베총리의 기념사도 그런 것이었잖아요. 미래사회에 더 이상 사과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게 90년대부터 시작했던 이야기에요. 그런 역사인식의 연장선에서 과거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된 것을 잊어버리고, 기록하지 않고, 잘한 것만 기억하려고 하다보니까, 이번에도 산케이 신문을 보니까 명성왕후 시해사건에 대해서 ‘민비가 암살되었다’고만 썼어요. 자기들이 죽였다는 이야기를 안 하는 거죠. 이렇게 대단히 파렴치한 역사서술로 이어지는 것이 결국 출발점은 90년대부터 이야기했던 자학사관 극복이라는 주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 김우성: 네,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더 용감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끊임없이 이렇게 계속된 잘못을 반복하는 것, 내부 결속 같은 요구도 아마 있었을 겁니다.

◆ 전우용: 그것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경제가 어려우면 사회 자체가 우경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중심화 되는 거죠. 그런 경향에서 나타난 하나의 사회 현상, 문화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여겨야 할 지점도 많을 것 같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거든요.

◇ 김우성: 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한양대 동아시아문제 연구소 전우용 교수와 함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전우용: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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