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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범죄의 재구성] 대구 정은희양 사건, 아직 ‘실낱 희망’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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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서경원 기자]17년 전 발생된 대구 여대생 정은희(당시 18세) 양 사망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스리랑카인이 지난 11일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재판부는 1심 후 새 증인으로 등장한 다른 스리랑카인의 진술은 피고인과 공범으로 추정되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전문진술(傳聞陳述)이라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 설령 증거능력이 있다하더라도 모순점이 많고 별다른 친분이 없는 증인에게 사건 상황을 아주 소상히 말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DNA 감식 결과 피고인이 정양에 대해 강간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이 역시 공소시효(10년)가 끝나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도 밝혔습니다.

검찰은 이번 결과에 대해 증인 진술이 추상적이어서 믿기 어렵다는게 아니고 너무 구체적이어서 믿기 어렵다는 건 억지 논리라고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정양과 그의 가족들의 17년된 한을 풀어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됐지만 피의자를 눈앞에 두고도 처벌을 하지 못하는 사건으로 남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다시 이 사건과 관련해 최근 대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했습니다. 끝까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입니다.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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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늦가을로 접어들던 10월 16일 오후 대구의 계명대. 새내기였던 정은희(당시 18세) 양은 캠퍼스 안의 주막촌에서 생애 처음으로 맞은 대학 축제의 흥을 즐기며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입니다.

밤 10시가 넘어서자 정양은 인사불성이 된 같은 동아리의 한 남성 친구를 집에 바래다주겠다며 몸을 이끌어 교문을 나섭니다.

하지만 정양도 이미 술이 많이 취한 상태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학교 주변을 지나가던 스리랑카 국적의 산업연수생들의 눈에 띄게 됐는데, 여기서 비극의 단초가 주어집니다.

대구 성서공단에서 일하던 이들 스리랑카인 3명은 마음속에 몹쓸 짓을 하기로 작정하고 정양을 자신들이 갖고 있던 자전거 뒷자리에 태웁니다.

1명은 자전거를 끌고, 나머지 2명은 정양을 뒷자리에 태운채 떨어지지 않도록 양쪽에서 부축하면서 인근 구마고속도로 아래 굴다리 근처로 끌고 갔습니다.

밤 11시쯤 학교 근처 병원 앞에서 정신을 차린 정양의 남성친구는 정양을 찾아봤지만 이미 자취가 사라진 후였죠.

이 친구는 그 당시 삐삐(무선호출기)로 정양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응답이 없었는데, 그저 혼자 집에 도착했겠거니 하면서 그대로 귀가하고 맙니다.

정양이 끌려간 구마 고속도로 아래는 당시만 해도 개발이 되기 전이어서 대부분 논이나 밭이었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습니다.

스리랑카인 3인은 정양을 상대로 이곳에서 성폭행을 벌입니다. 간호사를 꿈꾸던 여대생의 미래와 순결이 인면수심의 외국인들에 의해 참혹히 짓밟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들은 정양이 갖고 있던 현금과 학생증까지 빼앗았는데, 당시 현장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정양은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에 위험천만한 고속도로 노상 위로 뛰쳐 올라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로등 빛도 드문 깜깜한 밤이라 방향감지가 어려웠고 급기야 중앙분리대를 넘게 됐는데, 그 순간 시속 100㎞로 달려오던 덤프트럭에 정면으로 치이는 끔찍한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그렇게 못 다핀 열여덟살 여대생의 생이 마감된 것이죠.

범행을 저지른 스리랑카인들은 바로 그날 아침 태연하게도 공장에 정상 출근해 일을 했습니다. TV에서 정양 사망 소식을 듣긴 했지만 한국어가 서툴러 사망자가 자신들이 성폭행한 여대생인 줄 몰랐었다고 합니다.

시신이 된 정양의 속옷에선 남성 정액 DNA가 검출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관됐지만, 경찰은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수사를 진행시키지 않았습니다.

이후 유족들은 청와대와 법무부, 인권위 등에 60여차례에 걸쳐 탄원서와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경찰은 다시 움직이지 않았죠.

그러다 세월이 흘러 공범 2명은 2003년과 2005년 각각 불법체류자로 적발돼 강제출국 당해 한국을 떠났고, 나머지 1명만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체류할 수 있었는데 국내에서 버젓이 스리랑카 식료품 수입사업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유족들은 인터넷에 정양의 추모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이를 계기로 이 사건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검찰이 수사에 나서게 됩니다. 그러다 2013년, 사건 발생 15년만에 이 스리랑카인 검거에 성공하게 됩니다.

영구 미제로 남을 듯했던 이 사건은 이 스리랑카인이 2011년에도 아동 성폭력법 위반으로 입건돼 검찰이 유전자를 대조하는 과정에서 꼬리를 잡히게 된 것입니다.

이 스리랑카인은 지난해 5월 법정에 서게 됐습니다. 하지만 공소시효 문제 때문에 무죄 선고를 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검찰은 특수강간죄는 공소시효가 10년이라 아예 처벌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효가 15년인 특수강도강간죄로 기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강도 사실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법원의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검찰은 곧장 항소했지만 1심을 뒤집을만한 증거 확보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17년 전 같은 동포인 스리랑카인들의 범행을 들었다는 다른 스리랑카인을 만나게 됩니다. 범행 직후 술자리에서 자세한 범행 과정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지난 3월 법정에 나와 이같은 증언을 해줬습니다. 동료의 보복이 두려웠지만, 가족과 교회 목사님과 상의한 끝에 증언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결정적 순간에 나타난 이 스리랑카인의 증언이 항소심에서 1심을 뒤집고 유죄 판결을 이끌어 낼 수 있을거라 희망 섞인 전망이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같은 기대는 수포로 돌아가고 재판부의 판결에 많은 국민들이 아쉬움을 표하고 있습니다.

gi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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