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내가 한국 기관 대표라니 신기하대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저개발국 의료시설·인력 지원 국제보건의료재단 인요한 총재]

20개국 돕고 500명 불러 가르쳐

외증조부는 구한말 병원 세우고 조부도 구호활동한 '의료 4代'

"나처럼 서양인 얼굴을 한 사람이 외국에 가서 '우리 한국이 도와줄 테니 한국 의료 발전을 배우고 따라 하라'고 말하면 다들 신기해하면서도 진지하게 들어요."

파란 눈의 한국인 의사 인요한(56)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얼마 전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총재가 됐다. 세계의 저개발 국가에 우리나라 돈으로 보건의료 지원 사업을 벌이는 기관이다. 인 총재의 외증조부는 구한말 미국인 선교사로 조선에 와 병원과 학교를 세운 유진 벨이다. 유진 벨의 사위로 일제강점기부터 40여년간 교육과 구호활동을 펼친 윌리엄 린턴이 그의 할아버지다. 100여년 전 척박한 한반도에 들어와 교육과 구호에 힘쓴 외국인의 4대손이 이제 한국인이 되어 다른 나라의 보건의료를 도와주는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구호와 원조 역사에 남을 '발전적 선순환'이다. 인 총재는 2012년 귀화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말끝마다 '우리나라'를 되뇌었다.

조선일보

인요한 총재가 서울 중구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에서 재단이 지원 중인 나라들을 표시한 지도를 보여주고 있다. 100여년 전 선교사로 조선에 와 교육과 구호 활동을 했던 외증조부 유진 벨의 4대손인 그가 이제 한국인이 되어 외국 의료원조를 총괄하고 있다. /고운호 객원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인 총재는 취임 두 달 만에 벌써 우즈베키스탄·캄보디아·네팔 등을 돌며 지원 사업을 챙기고 있다. 재단은 아프리카·아시아·남미 등 20여 개국에서 보건의료 사업을 벌이고 있다. 파독(派獨) 광부와 중앙아시아 고려인촌 등 재외동포 의료 지원도 한다. 올해 예산은 380억원 정도다.

인 총재는 "알다시피 우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됐잖아요. 엄청난 속도로 경제와 의료 발전을 이뤘는데, 의료 인프라 지원 사업도 선진국보다 속도가 빨라서 곳곳에서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다"고 했다. 4년 전부터 캄보디아에서 산모와 태아 건강을 챙기는 통합 모자보건 증진과 어린이병원 건축 사업을 벌인 결과, 신생아 사망률이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고 한다.

국제보건의료재단은 한국인으로는 처음 국제기구 수장을 맡은 고(故)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기려 2006년 출범했다. 재단은 이종욱 펠로십을 통해 저(低)개발국가 의사·간호사·보건행정가를 국내로 초청해 1년간 기술과 행정 연수를 제공한다. 지금까지 에티오피아·과테말라·몽골 등 30여 개국에서 500명 넘게 다녀갔다.

인 총재는 "한 달 전에 우즈베키스탄에 갔더니 이종욱 펠로십을 마친 친구가 보건부 차관급 관리를 하고 있더라"며 "우리의 의료 시스템과 건강보험 체계를 배워 따라 하는 이들이 모두 '친한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 사업은 그냥 외국 사람을 돕는 게 아니라, 아픈 사람을 돕는 것"이라며 "재단 직원은 물론 해외에 나가서 의료 지원 활동을 하는 의료인 모두가 '작은 이종욱'이 되자"고 했다. 우리나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저개발국 보건의료 원조의 규모가 아주 적은 편이다. 국격에 맞게 이를 늘려 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외증조부와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후손을 보면서 뭐라고 할 것 같으냐"고 묻자, 인 총재는 "그분들은 한국인의 근면함과 성실함을 존중했고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한국 땅에서 열심히 활동하신 것"이라며 "지금 발전한 한국을 보면 '그럼 그렇지!'라고 하면서, 손자인 나에게는 '항상 섬기는 자세로 일하라'고 말할 것 같다"고 했다.

[김철중 의학전문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