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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미적분 빼야 수포자 감소?’…문제는 재밌게 가르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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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한겨레21]

수학 교육과정에 관한 토론에서 빠진 것… 왜 교육의 질적 문제는 토론하지 않을까

그 맥락만 이해해도 쓸모없는 과목을 뭐하러 배우느냐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텐데



고등학교 때 내 꿈은 고등학교 수학 교사였다. 수학을 좋아했는데 좋아하는 수학 선생님은 없었다. 물론 인격적으로 훌륭한 선생님은 있었지만 재밌는 수학 선생님이 없었다. 수학은 저렇게 재미없는 과목이 아닌데…. 롤모델이 될 만한 선생님이 없었기 때문에 난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재미있는 수학 선생님.

그럼에도 배워야 하는 사람들에게

수학 교육과정과 관련된 사회적 논란이 있을 때마다 본질적인 문제가 빠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학 교육의 범위를 조절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교육의 질적 문제에 대해서는 왜 깊이 토론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최근 미적분을 수학 교과과정에서 빼느니 마느니 하는 논란도 마찬가지다. 교과과정을 바꿔도 교육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변하는 게 별로 없을 것이다. 학생들이 수학이 재미없고 힘들기만 하다고 느끼는 한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가장 싫어하는 과목으로 수학을 뽑는 학생이 많은 현실에서 수학 교육과정을 간소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공교육에서 요구하는 커리큘럼만 두고 보면 한국 교과과정은 양과 질 모두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여기에 입시 열풍이 더해진 결과 한국 고등학생들의 수학 실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비정상적으로 과도한 학습량에 비한다면 그 효과가 지속되는 시간은 허무할 정도로 짧다. 빠르게 많이 배운다고 무조건 효과가 좋은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 모두에게 똑같은 수준의 수학 실력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둘, 그럼에도 배워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수학이 더 재밌다는 것을 혹은 덜 지루하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흥미를 갖고 몰두하게 된다. 여기서는 주로 두 번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자.

흔히 수학을 배우는 목적이 논리적 사고 배양에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수학을 배워서 논리적 사고가 키워진 것 같니?’라고 물어보자. 이 질문에서 이미 판가름 난다. 한국의 수학 교육은 실패다. 왜 수학이 논리적 사고를 키워주는지도 설득하지 못한다.

한국 수학 교육에는 스토리텔링이 전혀 없다. 수학 개념이 등장한 시대적 배경, 그 개념이 정착되는 과정, 그 과정에서 벌어진 논쟁들, 정착 이후 확장·적용되는 과정 등등에 대한 설명이 없다. 학생들은 단지 유형별로 분류하고 반복해서 풀고 외울 뿐이다. 하지만 익숙한 유형을 벗어나면 회로가 엉킨다. 심지어 용어 정의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학생이 드물다. 논리체계가 일관되게 작동하지 않는데 논리적 사고가 키워질 리 없다.

수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그 맥락만 이해해도 쓸모없는 과목을 뭐하러 배우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고도 수학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수학을 배우지 않을 자유 정도는 주었으면 좋겠다.

수학은 촘촘한 피라미드와 같은 논리체계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수학은 부분적으로 발전했다. 어떤 내용은 그리스보다 앞선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지식은 결코 학문으로 정립되지 못했다. 차라리 측량에 가까웠다. 수학은 측량을 위한 보조도구에 불과했다. 높이가 같은 원뿔과 원기둥의 부피비가 왜 1:3이냐고 물으면 이집트인이나 메소포타미아인은 실제로 원뿔과 원기둥 모양의 그릇을 만들어 부피를 측정했을 것이다. 원뿔에 물을 가득 담아 원기둥에 부었더니 세 번 만에 꽉 차더라 하는 식으로. 이집트라면 모래를 채웠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들은 원주율을 3.1이라고 쓰기도 했고 3.2라고 쓰기도 했다. 측량 결과에 따라 적당한 근삿값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리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논리를 사용했다. 개념을 설정하고 논리적 인과관계로 모든 명제를 이끌어냈다. 민주주의가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처럼 그들은 수학적 사실을 감이 아닌 논리로 증명했다. 그들에게 측량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부피비가 정확히 2.999배인지 혹은 3.001배인지 심지어 3.0000000000001배인지는 측량으로 알아낼 수 없다. 오직 수학적 방식의 증명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스에서 수학은 학문이 되었다.

이런 노력은 유클리드의 <원론>으로 집대성됐고 단 다섯 개의 공리(증명 없이 참으로 받아들이는 명제)로부터 뻗어나가는 방대한 논리체계로 발전했다. 선험적 진리(공리)를 전제로 모든 사회구조와 체계를 배치했다는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공리체계를 정교하게 다듬어온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 법전에 기초한 현대적 법체계가 공리체계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와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거쳐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책과 문서들이 원론의 형식을 따라한 것은 자신의 말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라는 자부심 혹은 권력의지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독립선언문은 이 공리(자명한 진리)에 기초하여 영국 정부의 행동이 왜 잘못된 것인지 마치 수학 문제를 증명하듯 설명하다가 미국의 독립은 정당하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중세의 언어로 자연을 설명할 수 없을 때

중학교 교과과정은 그리스 수학을 주로 다룬다. 핵심은 이미 알려진 사실만을 이용해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논리적 인과관계에 대한 훈련이다. 이 체계는 일정하게 수정이 가해졌지만 지금도 수학적 방법의 근간을 이룬다. 그리스 수학체계는 2천 년간 지속됐다. 기나긴 중세를 지나 근대에 이르러서야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출발은 좌표의 도입이라 할 수 있다.

위도와 경도만으로 지구상의 위치를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좌표는 숫자의 조합으로 점의 위치를 나타낸다. 이 점들이 움직이며 만들어낸 곡선이 그래프이고 식으로 나타내면 함수가 된다. 함수와 그래프를 연구하는 수학 분야를 해석학이라고 하는데 해석학은 궁극적으로 미적분을 다룬다.

미분(微分)은 말 그대로 그래프를 아주 잘게 쪼개는 것이다. 잘게 쪼갠 다음 아주 작은 영역에서 그래프가 얼마나 빨리 증가하는지 감소하는지를 숫자로 나타낸다. 이 수치를 기울기라고 한다. 시간-이동거리 그래프인 경우에는 기울기=속도를 의미한다. 그래프가 빠르게 증가하면 속도가 빠른 것이고 그래프가 느리게 증가하면 속도가 느린 것이다. 그래프가 내려가면 속도는 감소한다.

마치 원자들이 모여 물질을 구성하듯 잘게 쪼개진 점들이 모여 하나의 그래프를 이룬다. 각 점에서 분석한 증감 패턴을 종합하면 전체 그래프의 모양이 나온다. 미분을 할 줄 알면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그래프를 그릴 수 있고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 최댓값과 최솟값을 알아낼 수 있고 방정식의 해의 개수도 설명할 수 있으며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현상을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 다양한 사회현상이나 자연현상에 몇 개의 변수를 설정해 함수로 모델링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도 있다. (*적분(積分)은 반대로 잘게 나뉜 조각을 모아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드는 것이다. 지면의 한계로 적분에 대한 이야기는 넘어가도록 하자. 다만 덧셈과 뺄셈, 곱셈과 나눗셈처럼 미분과 적분이 쌍둥이 자매라는 사실 정도만 기억하자.)

원자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동시에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었듯이 한 점, 한 점에서의 패턴을 읽어낼 수 있게 되자 그래프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무한히 작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무한히 큰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2의 1000승#이 얼마나 큰 수인지 알아야 #1/2의 1000승#이 얼마나 작은 수인지도 알 수 있다.

미적분은 기본적으로 근대의 학문이다. 핵심은 운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물체가 더 빨리 떨어진다고 말했다. 돌이 깃털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돌이 흙으로 구성되어 있어 본래 자기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려는 속성 때문이라고 했다. 단테의 <신곡>에는 천국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하늘은 9개의 동심원형 구조로 되어 있고 그 바깥에 천국이 있다고 생각했다. 근거 이전에 의지가 작동했던 것이다.

더 이상 중세의 언어로 자연의 법칙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미적분이 등장했다. 뉴턴은 인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수학을 사용해서 천체의 운동을 매우 정확하게 설명해냈다. 미적분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뉴턴은 역설적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성경에 암호화된 신의 언어가 담겨 있다고 믿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비교 분석하며 그리스도의 재림 날짜를 알아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NGC 다큐멘터리 <코스모스> 3편). 그런 그가 중세의 언어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주었다고 놀랄 것은 없다. 한 발은 과거에 걸친 채 나머지 한 발로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노력이 세상에 대한 인식을 바꿔왔다.

1년 차이가 본질적인 문제겠는가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오히려 미적분을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결론으로 가야 할 것만 같지만 그렇지 않다. 고등학교를 마치면 대략 17~18세기 정도의 수학을 이해할 수 있다. 수학과 학부를 졸업해야 겨우 현대수학의 흐름 정도를 따라잡을 수 있다. 수학의 세계는 엄청나게 방대하다. 대부분은 거인들이 남겨놓은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만 해도 벅차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까지 배워야 하는 것일까? 사람마다, 써먹고자 하는 일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교과과정을 줄이자는 주장에 동의한다. 근대수학의 흐름 정도를 따라잡는 게 목표라면 1년 빨리 배우느냐 늦게 배우느냐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사람들은 교과과정이나 입시제도를 손보면 사교육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이 있다. 학력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어떤 제도를 도입해도 사교육으로 드러나는 과잉경쟁을 막을 수 없다. 사람들은 억 단위의 돈을 쓰더라도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면 그 돈을 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처럼 교과과정이나 입시제도가 자주 바뀌는 나라가 별로 없다. 매번 사교육을 줄여야 한다는 명분이 따라온다. 그런데 사교육이 한 번이라도 줄어든 적이 있었나? 능력과 무관하게 출신 학교에 따라 임금 격차가 현격하게 벌어지는 사회에서는 이 현상을 막을 수 없다. 좋은 사회가 될 때 좋은 수학 교육도 당연히 따라온다.

나동혁 수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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