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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최보식이 만난 사람] "날 보고 희망 갖는 사람들 생겼으니…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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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을 잃고 그림을 그리다… 박환 화가]

"연필이 아닌 끈으로 밑그림을 그렸던 것

손대중으로 구도 잡은 뒤 끈 잘라 붙이고 핀 꽂아"

"우리 오빠는 화가

첫 번째는 목숨을 살리 고두 번째는 눈을 살리는 것

눈은 화가의 생명과 같아"

화가용 앞치마를 두른 박환(58)씨가 천천히 다가왔다. 두 눈을 뜨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허공을 맴돌 뿐 상대를 응시하지는 않았다. 그의 왼쪽 턱선으로 길게 파인 흉터가 남아 있었다.

화가 경력 30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도 몇 차례 입선했고 개인전과 초청전도 한 번씩 가졌다. 그런 그가 2013년 말 교통사고로 두 눈의 시력을 잃었다. 볼 수가 없으니 색채(色彩)를 다루는 화가의 삶은 끝났다고 여길 것이다.

조선일보

박환씨는 "안 보여도 나는 화가로 살아야지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이라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안 보여도 나는 화가로 살아야지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말이죠."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한 아파트. 거실의 창가에 캔버스가 세워져 있었다. 화폭에는 하늘과 집과 나무가 그려 있었고, 탁자 위로 팔레트와 유성물감들이 어수선했다.

"여기다 오솔길을 내고 꽃밭도 그릴 거예요. 완성된 게 아니고 작업 중입니다. 손으로 더듬어가며 그리기 때문에 한 달쯤 걸려요."

―이렇게 굴곡 있는 선과 형체를 그릴 때면 살짝 눈 뜨고 봐야겠군요(웃음)?

"사람들은 그렇게들 얘기해요(웃음). 가령 수천 개의 점을 찍어야 그림이 완성된다면 저는 캔버스에 찍힌 그 수천 개의 점을 다 기억해야 해요. 그렇게 집중해야 합니다."

캔버스 위 형체의 윤곽선은 볼록했다. 손으로 만져보니 채색(彩色)된 선 속에 나일론 끈이 들어 있었다. 선의 굵기에 따라 그 속에 들어간 끈의 굵기도 달랐다. 그는 연필이 아닌 끈으로 밑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손대중으로 캔버스에 구도를 잡은 뒤 끈을 잘라 붙이고, 경계점마다 핀을 꽂는 식이었다.

이혼해 혼자가 된 그에게 여동생(55)이 조력자였다. 그가 주문하는 대로 끈을 잘라주고 물감을 쥐여줬다. 캔버스에 구도를 잡으면서 어디에 어떤 색상을 집어넣을까를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붓이 아닌 오른쪽 집게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그렸다.

"붓보다는 손가락 감촉이 더 정확하니까요. 원하는 색상을 내려면 물감을 섞어야 하는 경우가 많지요. 어떤 물감끼리 섞어 어떤 색이 나왔다는 걸 떠올리려고 애쓰지요. 보이지 않으니 과연 그 색상이 정확하게 나왔는지는 알 수 없어요. 간혹 실수로 완전히 엉뚱한 색을 칠할 때도 있어요."

1년 반 전 교통사고 당시, 조수석에 탔던 그는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차는 내리막길에서 앞선 트럭을 들이받았다. 차의 운전석은 멀쩡하고 조수석만 깔아뭉개졌다. 성냥갑처럼 찌그러진 차를 절단해 그를 꺼냈다. 여동생이 당시 상황을 얘기했다.

"차 상태를 보면 그때 살아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했어요. 머리는 수박통처럼 부풀어올라 있었고 피범벅이 된 얼굴 뼈들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어요. 의료진은 '수술을 해도 가망이 없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 없으니 해보겠다'고 말했어요. 뇌수술을 두 번 했어요. 수술을 마친 뒤 의료진은 '반신불수나 식물인간이 될지도 모르니 대비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뇌 기능에는 크게 이상이 없고 신체 움직임도 정상적이었어요."

뇌수술을 받은 뒤에는 산산조각이 난 얼굴 속 뼈들을 맞춰야 했다. 작은 뼛조각들은 긁어내고 인공 뼈를 끼워 넣었다. 하지만 손상이 심했던 얼굴의 왼쪽 부분은 회복되지 않았다. 왼쪽 귀는 안 들리고 입은 안 열리며 혀 감각은 손상됐다. 그의 말투는 어눌해졌고 음식 맛은 거의 식별할 수 없게 됐다.

"정말 문제는 눈이었지요. 사고 당시 왼쪽 눈의 시신경이 끊겼어요. 오른쪽 시력은 절반쯤 살아 있었어요. 당시 의료진에게 '우리 오빠는 화가다. 첫 번째는 목숨을 살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눈을 살리는 것이다. 눈은 화가의 생명이다'라고 애원했어요. 하지만 시간을 다투는 뇌 수술과 얼굴 수술이 먼저였으니까요. 그걸 마쳤을 때쯤 오른쪽 시력도 마저 잃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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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을 잃은 뒤의 작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의식이 돌아온 오빠는 자신이 안 보인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병원에서 오빠가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걸 통보받았지요. 하지만 오빠에게는 그대로 전할 수가 없었어요. 충격을 받을 오빠를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던 거죠. '좀 지나면 보일 거야, 조금만 참아.' 오빠는 그걸 믿었고, 저도 '혹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죠. 다른 병원에도 돌아다녔으니까요."

결국 시력을 잃었다. 시각장애 1등급. 빛에도 전혀 반응을 못한다고 했다. 지금도 혼자 다닐 수 있는 공간은 침실과 화장실, 거실 소파, 캔버스가 놓인 자리, 현관 출입문 앞의 엘리베이터뿐이다.

"퇴원할 때 주치의 선생님이 말했어요. '본인이 볼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폭풍이 몰아치듯 쇼크가 올 것이다. 심리치료도 받아야 될 것이다'라고. 사고 전까지 오빠는 일년 365일을 화실(畵室)에 나가 살았어요. 퇴원한 뒤로는 거실 소파에 쭈그리고 앉아 한숨만 내쉬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한 번씩 폭발하고."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저런 오빠와 24시간 함께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게 감당이 안 됐어요. 비탄 속에 빠져 있는 오빠를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려고 시작했던 거죠. 어떤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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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의 작품(우리집 대문).


―어떻게 했던 거죠?

"연필과 스케치북을 오빠에게 줬어요. '글씨를 써봐. 사인을 해봐. 줄이라도 그어봐.' 오빠는 화를 냈어요. '안 보이는데 어떻게 쓰라는 거야.' 글자는 비뚤비뚤하게 겹쳤고 줄도 맞지 않았어요. 하지만 말했어요. '봐라, 잘 쓰네.' 오빠는 정말 그런 줄 알았대요. 좀 더 지나서는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어요. 역시 말해줬어요. '잘 그리네. 봐라, 되잖아.' 그렇게 시작된 거죠. 하지만 오빠가 이렇게까지 그리게 되기까지는 숱한 눈물을 흘렸죠."

그는 미대(美大)를 나오지 않았고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지도 않았다.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나와 용돈벌이로 그림을 그렸고, 군대를 제대한 뒤로는 밥벌이로 그렸다. 그는 1982년 제 1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출품해 낮은 등급인 입선을 했다. 그 뒤로 네 번 더 출품해 입선했다.

"먹고살기 위해 상업적인 한국화를 그렸어요. 당시 60호 크기(130.3×89.4㎝) 한 점에 25만원쯤 받았어요. 하루 이틀이면 그렸지요. 작품이 아니라 상품이었지요. 그런 세월을 쭉 살다가 10년 전부터 싫증이 났어요. 나를 표현하고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 작품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는 새로운 표현 기법을 모색했다. 썩은 나무껍질이나 베니어판 조각을 붙이고 그 위에 물감을 덧칠해 질감과 입체감을 살리는 식이었다. 2012년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 때까지 그는 몇 년간 화실에 붙박여 미친 듯이 그렸다고 한다.

개인전을 열었던 화랑에서는 '꿈꾸는 리얼리스트'라는 제목으로 그를 소개했다.

'누추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의 가파른 계단길이며, 옹벽이며, 화장실이며, 전신주에 붙어 있는 간판이며, 길갓집의 불 켜진 작은 창문이며…, 달동네를 통해서 어둠 속 한 줄기 희망의 빛을 그리고, 가난과 궁핍으로 인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사람의 따뜻한 정을 그리며, 암울한 과거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그린 화가.'

이듬해 2013년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아트페어'에 초청됐다. 당시 자료를 찾아보면 그의 작품은 호평을 받았던 것 같다.

"제 그림이 비싼 가격에 다 팔리기를 원했어요. 하지만 몇 작품만 흥정이 오갔고 가격을 낮춰달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동안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나를 평가하는 게 이 정도냐. 오기가 생겨 하나도 안 팔았어요. 돌아보면 그때 너무 건방졌고, 한편으로 좋았지요."

그리고 바로 보름 뒤 교통사고가 났다. 개성 있는 화가로서 꽃이 피었다 싶었는데 지고 말았던 것이다.

―안 보인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캄캄한 게 아니라 깜깜해요. 깜깜한 어둠이 바로 앞에서 막고 있어요. 안 보이니까 상대 표정을 볼 수 없으니 대화가 잘 안 돼요. 말하기가 점점 싫어져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형상은요?

"대부분 흑백(黑白)이지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올리는 형상만 색깔이 있을 뿐이죠."

―그림을 그려놓고도 본인은 볼 수가 없는데?

"캔버스를 만져보면 내가 어떻게 칠했는지가 떠오르니까, 상상으로 보는 것이지요."

시력을 잃은 뒤로 지금까지 그는 스물다섯 점을 그렸다. 이제 그의 그림은 밝고 화사하다. 그가 볼 수 없기 때문인지 대부분 비슷한 풍경들이다.

―그전까지 그림은 사회성이 짙고 어두웠는데, 지금 그림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와 붉은색 지붕, 알록달록한 꽃들이 나오는군요.

"밝고 평온한 세상에 살고 싶어요. 제 꿈을 담고 싶었어요."

그는 아이처럼 말했다.

―꿈이라면?

"퇴원한 뒤로 정말 살고 싶지 않았지요. 차에 뛰어들거나 아파트 아래로 뛰어내릴까 하는 충동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안 보이는 제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저런 사람도 살아가는데' 하며 희망을 갖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인터넷으로 제게 온 편지를 여동생이 대신 읽어주고, 답장도 해줘요. 제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지요."

―잠들면 꿈은 꾸지 않습니까?

"꿈을 별로 꾸지 않지만 며칠 전에는 꿈을 꿨어요. 꿈에서 제 눈이 보이는 줄 알았어요. 빛이 들어오는 아침인데 캔버스에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들이 그려 있는 거예요."

[최보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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