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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갈치골목 보일러 의자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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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인생 2막'사는 거리의 의자들

한국일보

서울 남대문 시장 골목에 놓여 있는 보일러 철제의자. 겨울엔 추위를 녹이는 뜨끈뜨끈한 의자지만, 차가운 금속 표면 덕분에 여름에도 사용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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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포 앞 곳곳 수십년째 놓여 있어전기선, 온도조절기 달려 '따끈따끈'

27일 서울 남대문시장 갈치골목에서 식당주인 김점순(67?여)씨를 만났다. “이래 봬도 비싼 의자여” 김씨가 가게 앞 오래된 철제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투박한 골격과 군데군데 산화된 철판, 번들거리는 뭉툭한 모서리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다. “보일러 의자라 겨울에 온 종일 밖에서 손님 기다릴 때 딱 좋아” 자세히 살펴보니 의자 밑에 전선과 온도 조절기도 달려 있다. 일년 내내 점포 밖에서 ‘손님 모시기’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인들을 위한 전천후 의자인 셈이다. “우리 시장에 꽤 많다”는 김씨 말대로 철제의자는 시장 골목 여기저기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아동복매장과 모피상점, 약재상, 김 도매상까지, 철제의자와 시장상인들은 길바닥 위의 고된 삶을 함께 해 왔다. 김씨의 색 바랜 철제의자 역시 30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씨는 세월이 많이 흐르면 누가 이 의자에 앉게 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사람은 떠나도 의자는 이 자리에 남아 있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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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시장의 2인용 보일러 철제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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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 철제의자는 남대문 시장 곳곳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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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대문로의 한 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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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대문로의 한 보석 매장 앞(왼쪽)과 용산구 원효로의 버스 정류장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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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거실 식당 사무실에서 한자리 차지했었던 그들이젠 거리로 내몰려

시장골목을 나와 걷다 보니 거리에서 마주치는 의자마다 모양도 처지도 제 각각인 게 신기하다. 오랜 시간 시달린 끝에 팔걸이가 부서지거나 쿠션이 주저 앉아버리는 비극은 모든 의자가 겪는 운명이다. 곧이어 사형 선고를 받고 버려지는 의자들, 마치 도축을 앞둔 가축처럼 폐기물 스티커를 붙인 채 외롭고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여기서 모든 게 끝이라면 이 세상은 얼마나 매정한 곳인가. 비록 지저분한 길바닥 한 구석이지만 제2의 삶을 이어가는 의자의 모습은 결코 처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갈수록 더 삐딱해지는 병 때문에 보석 매장에서 쫓겨난 외다리 회전의자는 ‘경비用(용)’이라는 이름과 함께 새 삶도 얻었다. 등받이가 완전히 부러진 중국집 의자가 배달요원의 휴식 시간을 책임지고, 사무실에서 은퇴한 후 버려진 회전의자는 옥수수 노점상 덕분에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쿠션이 예전 같지 않아 퇴출된 소파 세트는 마을 버스 정류장을 아예 사랑방으로 만드는 친화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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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시 덕이동의 한 중국집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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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로구 개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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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성남시 분당구 대왕판교로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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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세종대로의 한 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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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속초시의 한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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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아저씨 휴식처로주차금지 팻말로새로운 인생을 산다

거리의 의자는 원래 휴식과 안락함을 선사하는 의자로서의 역할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차분하고 편안한 색감이 어울리는 식탁 의자가 ‘주차금지’ 팻말을 달고 골목길 주차전쟁에 투입된 광경도 그래서 낯설지 않다. 인적 뜸한 교외의 한 농막에선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을 녹슨 의자 한 쌍이 쉬엄쉬엄 해낸다. 가볍고 튼튼한 간이의자의 용도는 더욱 무궁무진하다. 판매할 물건과 선풍기를 올려 놓거나 노점상의 커다란 유리 진열장을 지탱하는데도 요긴하게 쓰인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소파마저도 바닷가에 덩그러니 놓인 그 자체로 훌륭한 풍경을 만들며 꺼져가는 생을 마감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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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시 주엽동의 한 공원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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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서울N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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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을지로 공항버스 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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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소를 오랫동안 지켜온 의자에 소중한 사연을 남기고 싶은 충동은 젊은이들만의 특권인가보다. 수많은 사랑이 스쳐간 커플벤치마다 썼다 지우고 또 쓴 낙서가 겹겹이 남아 있다. 여행객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 수하물 번호표를 공항버스 정류장 벤치에 어지럽게 붙여 놓고 떠난다. 어떻게든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듯. 봄 꽃잎부터 여름 이파리, 가을 낙엽, 하얀 눈까지 계절 따라 공원 벤치가 그려내는 한 폭의 그림은 항상 그 자리에 있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최민영 인턴기자(숙명여대 법학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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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시의 한 아파트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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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대문시장. 스티로폼으로 만든 간이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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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시의 한 공원. 구부러진 알루미늄 패널에 반사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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