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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그리스 정부와 월가의 ‘어두운 거래’ 비극의 씨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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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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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그리스 긴축안 반대 이후 / 흔들리는 유로존

그리스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2001년 골드만삭스 파생상품 도입

재정적자 수치 줄여 유로존 가입

자본 몰려들어 고물가·고임금 ‘거품’

2008년 금융위기로 타격

2009년 적자 GDP의 12.5% 실토

장밋빛 꿈이 악몽으로 변해



금융위기의 물결이 넘실대던 2009년 10월20일.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 재무장관 회의에서 게오르기 파파콘스탄티누 그리스 재무장관이 놀라운 고백을 했다. 그리스 정부의 재정적자가 당초 발표된 대로 국내총생산(GDP)의 6%가 아니라 12.5%나 된다는 ‘폭탄 선언’이었다.

동료 재무장관들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 문제가 지금까지 지속되며 유로존 해체까지 위협하는 전대미문의 사태로 격화될 줄은 당시 아무도 몰랐다. 그리스 정부의 방만한 재정운용 문제라고만 여겼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의 탐욕과 유로존 체제의 모순이 얽힌 사태의 진실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현재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장 클로드 융커 당시 유로그룹 의장은 “게임은 끝났다”며, 그리스 정부의 부정확한 재정 통계를 비난했다. 하지만 진짜 게임은 그게 아니었다. 금융자본의 탐욕을 채우는 돈놀이 게임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재정적자를 감춰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리스 부채위기가 시작되던 그해 11월초 미국 월가의 금융회사 골드만삭스의 회장 게리 콘이 이끄는 팀이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했다. 이들은 부채 관리에 허덕이는 그리스 정부한테 의료보험 부채를 미래로 이월해 숨겨주는 파생상품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과거 그리스 정부들이 어떻게 부채를 숨기고 더 많은 빚을 내어 3000억유로라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는지 비밀을 드러냈다.

그리스는 2001년 골드만삭스에 3억달러를 주고 이런 파생상품 기법을 도입해 재정적자를 축소해 유로존의 재정 기준을 맞췄다. 그리스 정부는 미래에 들어올 공항 이용료를 담보로 골드만삭스로부터 28억유로를 빌렸다. 이는 장부에 부채가 아니라 수입으로 올랐다. 이 거래는 그리스 신화 속 바람의 신의 이름을 따 ‘아이올로스’로 불렸다.

이런 거래는 2000년 미래 복권 수입을 미리 당겨쓰는 파생상품 거래인 ‘아리아드네’로부터 시작됐다. 그리스 신화에서 크레타 왕 미노스의 딸인 아리아드네는 아테네 왕자 테세우스에게 반해 아버지를 배신하는 여인이다. 이 배신은 그 자신과 가족의 운명에 비극의 시작이었다. 반면, 그리스와 월가 금융자본의 거래인 아리아드네는 모국 그리스에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그리스와 골드만삭스만의 ‘악행’이 아니었다. 유로존 가입 전후로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은 월가의 골드만삭스와 제이피모건체이스가 개발한 이런 파생상품 기법을 채용해 유로존 가입기준을 맞췄다. 이탈리아는 제이피모건의 도움으로 1996년에 예산 기준치 기준을 겨우 맞춰 유로존 가입의 토대를 마련했다.

골드만삭스 등에게 이 거래는 매력적이었다. 국가를 상대로 마음대로 돈을 뜯어냈다. 아이올로스 거래에서 골드만삭스는 실제로는 28억유로를 빌려줬으나, 그리스는 돈을 건네받은 순간부터 수수료 등을 포함해 34억유로를 빚진 상태가 됐다. 2005년에는 51억유로로 불어났다. 더 큰 문제는 골드만삭스 등이 이 거래를 통해 그리스 등의 투자적격도를 조작해 준 것이다. 이를 믿고 민간 투자자들은 그리스 등의 채권을 구입했다.

그리스의 이런 무리한 유로존 가입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이었다. 유로존 가입 전까지 그리스는 재정적자 관리가 지속가능한 상황이었다. 1999년 무역적자와 예산적자는 국내총생산의 5% 미만이었다. 그리스의 유로존 가입이 기정사실화된 1999년 이후 이 적자와 부채는 급격히 불어났다.

이미 그리스에는 90년대 중반부터 돈뭉치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상태였다. 금융자본들은 그리스의 유로존 가입이 현실화되면, 채권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로 그리스를 상대로 베팅에 나섰다. 특히, 독일 등 북유럽의 은행과 투자자들은 당시 자신들 나라의 이자율에 비해 5~6배나 높은 그리스 채권 투자에 집중했다. 90년대 초반 그리스 10년 국채의 이자율은 20%였다. 이는 2002년에 3%까지 떨어졌다.

90년대부터 그리스에 밀려든 돈들은 그리스의 경제를 활황으로 바꾸는 듯했다. 그리스는 성장율 4% 내외로 유럽에서 두번째로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물가와 임금이 오르고, 그리스의 수출경쟁력은 떨어졌다. 2001년 유로존 가입은 이런 추세를 더 악화시켰다. 그리스가 자국의 경제 실력보다 가치가 높은 유로화를 사용하게 되면서 차입비용은 더 낮아졌으나, 수출경쟁력은 더욱 떨어졌다. 적자와 부채가 쌓이지만 손쉽게 돈을 빌릴 수 있는 그리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뻔했다. 이런 변곡점에 개입한 것이 바로 월가 금융자본이었다. 그리스는 적자와 부채에 허덕이면서도 이들과의 거래를 통해 돈을 더욱 쉽고 싸게 빌릴 수 있게 됐다.

그리스 경제 자체의 문제도 있었다. 심각한 탈세와 방만한 정부 지출이 국내적 요인이었다. 2010년 기준으로 탈세액은 200억유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2013년에는 경제위기의 영향도 있었지만, 전년도에 비해 조세 수입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리스 부유층이 세금을 피해 스위스 은행에 쌓아둔 돈은 약 800억유로로 평가된다. 그리스의 자영업 비중은 유럽연합 평균 15%의 두 배가 넘는 31.9%다. 정부로서는 조세 징수를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흔히들 위기의 원인으로 거론하는 그리스의 사회복지 비용은 국내총생산의 20%를 조금 넘는다. 유로존과 유럽연합에서는 중간 수준이다. 사회복지 비용의 대부분은 연금 지출이다. 실업률이 높은 그리스에서 연금은 서민들의 중요한 생계 수단으로 양날의 칼 같은 존재다. 경제가 잘 돌아가면, 연금 역시 유효한 소비원이지만, 경제가 막히면 정부와 재정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국내총생산 대비 국방비는 2%를 넘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 중 미국 다음으로 높다. 그리스 위기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사회복지 비용에 비해, 과도한 국방비라는 요인은 가려져 있다. 미국과 독일은 그리스에 무기를 파는 최대 수출국이다.

유로존 가입으로 그리스의 수출경쟁력이 점점 약화되고 차입만 쉽게 되는 상황은 그리스 경제의 약점과 맞물려 증폭되어 갔다. 2008년 월가에서 금융위기가 폭발해 유럽으로 번졌다. 독일 등 북유럽의 유로존 핵심국가로부터 그리스 등 남유럽의 주변부 국가로 흘러가던 자금의 물결이 갑자기 마르기 시작했다. 그리스 정부가 2009년 11월 자국 재정적자의 실체를 공개하자, 그리스 부채위기는 불붙기 시작했다.

그리스가 국내외에서 빌려쓴 돈의 70%는 상업 은행 등 민간부문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민간 채권자의 대다수는 독일 등 북유럽의 유로존 핵심국가들의 민간은행과 투자자들이다.

금융위기를 부른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더 비난받았던 쪽은 돈을 빌린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런 약탈적 대출상품을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라고 부추긴 월가 투자은행 등 금융자본이었다. 그 기준으로 본다면, 그리스 부채위기는 그리스 정부와 국민만이 책임져야 할 사안인가? 그리스의 투자적격도를 조작하고, 높은 투자수익률을 노려 달려든 금융자본들은 여기에서 면책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리스 구제금융 상환 과정은 부채위기를 불러온 당사자들이 공평하게 책임을 지고 손실을 분담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이런 행태에 대한 분노가 결국 5일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채권단 요구에 대한 ‘반대’로 나타났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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