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그리스 위기> 지젝 "현존 자본주의는 민주주의 위축"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시리자를 유럽의 유산 수호할 '새로운 이단'에 비유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최병국 기자 = "현존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위축시키고 있다."

동유럽이 낳은 세계적 좌파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66)은 그리스 구제금융안 찬반 국민투표와 관련,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이끄는 집권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입장을 적극 옹호하며 이같이 주장했다.

현시대 철학계에서 일종의 '팝스타' 같은 존재인 지젝은 지난 5일(현지시간)자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 온라인판에 실린 인터뷰에서 유럽연합(EU)의 기존 정책은 그리스 위기가 반복되도록 하는 잘못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지젝은 치프라스 정권의 국민투표 시행을 유로화와 드라크마(예전 그리스 통화) 또는 EU 잔류와 이탈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려는 선동 전략으로 보는 시각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리스가 잔류 희망을 여러 차례 분명히 밝혀왔음을 상기시키면서 국민투표는 그리스를 파산의 구렁텅이로 내몰아온 EU의 기존 긴축정책을 계속 따라가느냐 아니면 이를 벗어나 (그리스와 유럽이) '새로운 길'을 열어가느냐를 가르기 위한 시도라고 강조했다.

지젝은 그리스가 '현실적인 새 출발'(realistischen Neuanfang)을 통해서만 경제를 회생시킬 구체적 계획을 내놓을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결국 위기가 반복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조차 그리스에 '숨 쉴 여지'를 만들어 줘 경제를 회생·재가동시키려면 대규모 부채탕감이 필요하다고 인정, 채무상환 20년간 유예를 제안하고 있다"면서 "이는 '완전히 새로운 위기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시리자 측 주장이 옳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시리자 정권의 지나친 공격적 발언이 채권자들을 적대적이게 만들고 총체적 불신을 초래하지 않았느냐는 슈피겔의 질문에 지젝은 "상황은 더 복합적"이라며 좌파를 포함한 모든 세력이 매우 어리석은 비판과 조언들을 쏟아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시리자 정부가 차분하게 '그렉시트'(EU 이탈)를 추진해야 한다는 제언에 대해 지젝은 "그럴 경우 그리스 복지가 30% 더 줄어들고 감당하지 못할 불행이 닥칠 것이며, 사회적 불안 심화로 심지어 군사독재를 초래할 위험까지 있다"고 경고했다.

또 "시리자가 집권 정당에서 벗어나 자신의 뿌리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일각의 요구에 대해서도 '공허한 호들갑'이라고 일축했다.

시리자의 '뿌리 회귀'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변화는 국가기구가 아닌 '풀뿌리', 즉 민중(사람)과 자치조직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젝은 "시리자 정권의 당면 과제는 채무와 관련한 국제적 압력을 어떻게 완화하느냐, 나아가 어떻게 권력을 행사하고 국가를 운영하느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풀뿌리 운동'과 자치조직은 국가를 대체할 수 없으며 국가기구들을 어떻게 재조직해, 기존과는 다르게 작동시키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유럽 중심주의 마르크시스트'로 자처해온 지젝은 현재 EU 내에서 진행 중인 싸움은 유럽의 정치·경제적 '주도문화'(Leitkultur; 지배문화)를 둘러싼 싸움이라고 분석했다.

강대국들이 지지해온 기존 기술관료주의적 체제를 관성적으로 유지하려는 세력과 이를 바꿔보려는 측과의 충돌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이와 관련해 "위대한 보수주의자 T.S. 엘리엇(영국의 시인)이 '이단(異端)과 불신앙(不信仰) 중에 택일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고 상기시켰다.

다시 말해 때로 본류에서 종파를 분리하는 것이 종교가 생명력을 유지할 유일한 방법일 수 있듯이 현재 유럽이 처한 상황에선 시리자로 상징되는 '새로운 이단'이 유럽의 생명력을 이어갈 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젝은 이 '새로운 이단'의 출현을 통해 민주주의와 사람에 대한 신뢰, 평등한 연대 등 유럽의 유산 중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보존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choibg@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