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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천번 만번 굿을 한들 할머니들 ‘위안부의 한’ 풀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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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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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부산 기장 오구굿’ 보유자 김동언 씨

“한도 많고 원도 많고 풀잎의 이슬같이 꽃다운 청춘은 다 보내고, 가슴에 한을 담고 가실 때 위안부 할머니들은 초망자굿에 넋이라도 혼이라도 뚜렷이 좌정하옵소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넋을 모셔오는 초망자(招亡者)굿이다. ‘부산 기장 오구굿’의 첫 대목이다.

무녀 김동언(61) 명인이 이승에서 부르는 소리는 저승의 김연희(6월26일 별세), 김외한(6월12일 별세) 등 위안부 할머니의 넋을 줄줄이 모셔왔다. 장구, 쇠(꽹과리), 징을 잡은 악사들의 구슬픈 소리가 뒤따랐다. 지난 4일 서울 남산골한옥마을의 서울남산국악당에서 ‘김동언의 오구굿’이 열렸다. 동해안 별신굿 집안의 4대째 세습무녀 김 명인이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여는 위로의 굿판이다.

오구굿은 죽은 사람이 생전에 이루지 못한 소원이나 원한을 풀어주고 죄업을 씻어 극락 천도를 기원하는 굿이다. 최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세 분이 별세해,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이미 189명이 원통한 가슴을 치며 땅에 묻혔다. 이제 생존자는 49명뿐이다. 광복 70돌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일본은 제대로 된 사과나 진상규명을 외면하고 있다. ‘이 시대 마지막 세습무녀’ 김동언 명인이 해원상생의 굿판에 나선 이유다.

4일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오구굿판
최근 별세 김연희·김외한 할머니 등
‘초망자굿’ 넋 모셔와 위로의 한풀이

‘마지막 세습무녀’…양아들 부부 이어
선친과 20년 전부터 위안부 위로굿
8월 14일 부산 영도다리 밑에서 굿판


“이 굿을 천번 만번 하더라도 그 한이 풀릴까요?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과 고통을 어찌 달래야 할지…. 이제 사십아홉 분만 남았는데, 너무 가슴이 아프고 그냥 모두 잊힐까 걱정입니다. 그건 돈으로 보상을 될 부분이 아니잖아요.”

김 명인은 할머니들이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한분 두분 돌아가시는 게 너무도 안타깝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20년 전부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굿을 해왔다. 아버지인 고 김석출 명인은 중요무형문화재 제82-1호 동해안 별신굿 보유자였다. 그의 셋째 딸로 태어나 동해안 별신굿 전수조교를 지낸 김 명인은 부산시무형문화재 제23호 ‘부산 기장 오구굿’ 보유자다.

생존 위안부 할머니의 평균 연령은 88.3살이다. 남아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지난 1일 미국 워싱턴 일본대사관 앞에서 처음으로 ‘미국 수요집회’를 열었다. 김복동(89) 할머니와 정대협 참석자들은 “아베 총리는 공식 사죄하라”, “미·일은 전쟁범죄를 덮지 말라” 등이 적힌 손팻말을 들었다. 하지만 일본은 아무런 답이 없다. 오히려 집권 자민당은 ‘전후 70돌 아베 총리 담화’에서 “위안부가 성노예임을 부정하라”고 아베에게 제언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굿은 정대협 등의 주최로 해마다 열어왔어요. 3년 전에는 채희완 부산대 교수님하고 여러 분이 주최해서 전국을 돌며 굿을 했어요. 한 2년 동안은 굿을 못 했는데,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김 명인은 민감한 문제라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꺼렸다. 하지만 광복 70돌인 올해는 8월14일 부산 영도다리 밑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굿을 올리기로 했다.

이날 무대에 오른 부산 기장 오구굿은 초망자굿에 이어, 무가를 부르며 여러 지옥을 면하도록 기원하는 지옥가, 망자의 넋을 담은 신태집을 들고 추는 신태집 춤, 신태집을 뱃줄에 실어 극락길을 닦아주는 길가름, 떠나는 자와 남은 자 모두의 한을 신명나게 풀어주는 극락소리의 순서로 진행됐다. 염불이나 고삼, 자삼, 가락 등 불교적인 내용과 색채가 짙게 밴 굿으로, 한국인 특유의 사생관을 보여준다. 특히 불교의 재(齋)와도 비교될 수 있는 형식이다.

동해안 별신굿과 부산 기장 오구굿은 현대예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오구-죽음의 형식>을 쓴 연출가 이윤택 선생과 자주 만나셨어요. 부산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할 때도 오셨지요.”

연극뿐 아니라 무용에서도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 됐다. 장유경 무용단은 지난 2월 동해안 별신굿 푸너리장단에 맞춘 춤판 <푸너리 1.5>를 무대에 올렸다. 여기서 1.5는 1과 2 사이로, 굿의 특징인 삶과 죽음의 경계, 현재와 미래의 경계를 뜻한다.

“4대째를 내려온 세습무는 저로서 맥이 끊깁니다. 이제 일반인들도 많이 오구굿을 배웁니다. 그래서 제 직계 후손 대신 양아들과 양며느리가 대를 잇게 됐는데, 그 둘이 부산 기장 오구굿 전수조교예요. 또 보존회에 전수장학생들도 여럿이고요. 세습무가 됐건 일반인이 됐건 전승이 잘 되도록 정부나 지자체에서 도와줄 의무가 있어요.”

이번 오구굿은 ‘남산골한옥마을 기획공연-국악, 시대를 말하다’ 시리즈의 하나로 열렸다. ‘언니들의 국악’ 프로그램에서 ‘굿하는 왕언니’로 초대된 것이다. 오구굿이 열린 4일 남산국악당 입구에서는 정대협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 1억인 서명’을 받았다.

글·사진 손준현 기자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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