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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절대음감의 이 청년, 타악기와 지휘봉 이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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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뤼숑 서울시향 팀파니 수석

중앙일보

국내 청중에게 아드리앙 페뤼숑은 서울시향 수석 팀파니스트로 익숙하다(왼쪽). 하지만 그는 지휘자로 국내 데뷔를 앞두고 있다. 지난해 멕시코에서 할리스코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모습. [사진 서울시향, 마르코 아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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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날도 오케스트라 맨 뒷줄에 있었다. 가장 뒤에서 지휘자를 정면으로 보며 연주하는 팀파티 수석이다. 이날 지휘자는 별 말이 없었다. 러시아의 거장 구에나디 로데스벤스키. 리허설은 짧게 끝났다.

별 생각 없이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오케스트라 매니저가 그를 불렀다. “지휘자가 대기실에서 잠깐 보잡니다.” 대기실의 지휘자는 일어서서 그를 맞이했다. “리허설 하면서 당신을 내내 관찰했다. 오케스트라 전체의 음악을 따라 마음 속으로 노래하는 걸 알았다. 지휘를 직접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 아마도 지휘자는 그의 눈빛을 읽었을지 모른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꿈을 포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의 이름은 아드리앙 페뤼숑(32). 고국 프랑스의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팀파니 수석이다. 어린 시절 또래 친구들이 경찰 혹은 소방관이 되고 싶다고 할 때 그는 지휘자를 꿈꿨다. 우선 피아노로 시작했다. 그러나 홀로 연주할 일이 많은 악기였다. 곧 오케스트라 악기 중 바순을 골랐다. 10대에 바순을 연주하러 가입한 밴드에서 그는 타악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서울시향에서는 ‘음악 천재’로 통했다. 아주 정확한 음감을 가지고 있었다. 리듬 감각이야 타악기 주자다운 것이었다. 짧고 빠른 리듬은 그의 손에서 정확히 쪼개졌다. 연주 때마다 오케스트라 전체의 악보를 외웠다.

지휘자 정명훈은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에서 그를 발탁해 2006년 서울시향 단원으로 투입했다. 오케스트라의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포기’가 자라고 있었다. 수많은 명지휘자 때문이었다. 다니엘 바렌보임, 클라우디오 아바도 등과 함께하며 오히려 좌절감이 커졌다. 아무리 잘해도 저렇게는 지휘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로데스벤스키는 마치 모든 그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는 듯, 그에게 지휘를 권했다. 5년 전의 일이다. 그는 지휘봉을 들 용기를 얻었다. 지휘를 공부하기 위해 학교에 다닐 시간은 없었다. 대신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보며 감각을 익혔다. 세계적 지휘자들도 찾아갔다. LA필하모닉의 전 상임 지휘자인 에사 페카 살로넨은 그의 짧은 지휘 경력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음악성을 알아봤다. 그는 LA필하모닉의 협업 지휘자 로 임명돼 내년 2월 LA에서 데뷔한다.

지난해 12월에는 뜻밖의 기회도 찾아왔다.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을 지휘하기로 했던 지휘자와 그 대타까지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무대에 설 수 없었다. 제3의 지휘자를 찾던 오케스트라 측은 페뤼숑을 지휘대에 올렸다. 갑작스럽게 무대에 올랐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곡의 모든 부분이 들어가 있었다. 지휘자를 포기한 적은 있었어도 지휘 공부를 중단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타악기 연주자냐, 지휘자냐. 그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 결정을 최대한 미루려 한다. 지휘자의 꿈을 조금씩 펴서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이달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지휘자로 처음 한국 무대에 선다. 음악제 오케스트라와 함께 비제·구노 등 오페라 작품을 지휘할 예정이다. 어쩌면 몇 년 후 세계 지휘계의 굵직한 이름이 될지 모르는 인물의 몸 풀기쯤 되는 무대다. 25일 오후 7시30분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 뮤직텐트.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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