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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금기 깬 성교육, 세상의 위선을 강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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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마틴 콜

영국 뒤흔든 'Growing Up' 1971년 발표한 23분짜리 비디오

실제 성행위 · 성기까지 보여줘, 종교계 · 정치계의 비난 거세

관념적 도덕에 맞선 동력은 엄격한 아버지와의 불화로

권위와 전통에 반발심 생겨…성을 무기로 사회의 위선에 저항
한국일보

1931. 10. 4 ~ 2015. 6. 2 식물학자이자 성과학자였던 마틴 콜의 1971년 청소년 성교육비디오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학교에서 활용될 만큼 모범적인 자료로 꼽힌다. 하지만 당시 영국 주류사회는 그의 비디오를 사탄의 유혹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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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생각에 의해서도 바뀌지만 생각 자체를 바꿀 때가 더 많다. 사회학자 오그번은 문화지체란 개념으로 그 현상의 일부를 해석했고, 푸코 같은 이는 권력이론으로 저 경향의 미시 메커니즘을 분석했다. 인류가 전통적 권위나 종교 정치 사회 문화 이데올로기를 당당하게 의심하고 그 의심을 두려움 없이 드러낼 수 있게 된 것도 극히 최근의 일이다. 성(性)의 문제, 특히 근대의 성에 대한 인식과 태도, 속과 겉, 현실과 법 제도의 괴리나 변화상은 후자의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미국에서 ‘킨제이 보고서’가 나온 건 연방대법원이 동성혼을 법제화한 오늘로부터 약 60년 전이었다. 킨제이보고서란 미국 동물학자 알프레드 킨제이(Alfred Kinsey)의 책 ‘남성의 성생활’(1948)과 ‘여성의 성생활’(1953)이다. 미국 사회의 반응은, 최근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서울광장 담장 안과 바깥 풍경만큼이나 극명하게 엇갈렸다.

청년들은 열광했고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53년 8월 시사주간지 타임은 킨제이의 얼굴을 커버에 싣고 “콜럼버스가 지리학에 기여한 바를 그가 성에 기여했다”고 썼다. 3년 뒤 그가 숨지자 뉴욕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성에 대한 과학적 경험적 연구의 어려움들- 고루한 성윤리와 개인ㆍ집단적 터부 등-을 나열한 뒤 “킨제이의 객관적이고 정밀한 접근은 그 난관들을 너끈히 극복했다”고 평가했다.

종교계를 비롯한 보수 주류사회는 킨제이를 ‘사탄의 심부름꾼’이라며 손가락질했다. 특히 금기의 벽이 두터웠던 ‘여성의 성생활’이 발표되자 한 통계학자(존 턴키)는 “엉터리 통계로 우리 할머니 어머니 고모 여동생 딸들을 모두 창녀로 만들어버렸다”고 성토했고, 연구에 돈을 대던 록펠러 재단은 아예 지원을 끊었다. 킨제이가 까발린 세상- 남성 3명 중 1명은 동성애를 한 번 이상 경험했고, 기혼 여성 4명 중 1명은 혼외정사를 했다는 등- 은 그들이 알던 세상과 너무나 달랐거나, 너무 위험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념적 세계를 지키기 위해 현실 세계를 부정했다.

한국일보

비디오 'Growing UP 성장'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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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영국의 식물학자 마틴 콜(Martin Cole)이 발표한 23분짜리 성교육 비디오 ‘Growing Up 성장’을 두고 영국 주류사회가 보인 반응도 20년 전의 미국과 흡사했다. 그가 교수로 일하던 아스턴(Aston)대학 학생들과 중등학교 교사들이 비디오를 본 뒤 보인 반응과 대조적으로, 종교계와 보수 정치ㆍ교육계는 콜을 ‘비뚤어진 색정광’이라 비난했다. 한 보수당 의원(Elaine Kellett-Bowman)은 시사회 직후 “그를 쏴 죽이고 말겠다”며 흥분했고, 콜이 살던 버밍엄 시의회는 관내 학교 필름 상영을 금지시켰다. 훗날 보수당 의원이 되는 한 시의원(David Gilroy Bevan)은 “이러다간 개들이 길에서 섹스하는 인간에게 물을 끼얹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당 히스 내각의 교육부장관이던 마거릿 대처는 그 해 4월 21일 하원 답변에서 각급 교육기관에 비디오 방영에 극히 신중을 기하라 당부하겠다고 밝혔고, 얼마 뒤 비디오에 출연했던 한 여교사는 학교에서 쫓겨났다. ‘The Sun’ 같은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콜에게 ‘Sex King Cole’이란 별명을 붙였다.

하지만 그들의 세상 역시 그들의 생각을 훨씬 앞질러 가 있었다. 경구 피임약이 개발된 게 61년이었고, 성 자유주의 물결은 60년대 청년 히피문화와 더불어 이미 전 유럽을 휩쓸고 있었다. 콜의 비디오가 나오던 해, 영국 20세 미만 여성 출산율은 1000명 당 50.6명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지만(텔레그래프, 2015.6.22)), 영국 가족계획협회 등의 피임 상담은 기혼자들에게만 허용됐다. 청소년 성지식은 친구나 화장실 낙서, 도식적인 그림과 인체의 앞쪽 절반을 잘라낸 인체 해부모형으로 진행되는 생물 수업에 의존해야 했다. 성교육 교재란 대개 문란한 성관계를 경계해야 한다거나 성병의 해악을 홍보하는 거였다.

거기에 콜의 비디오가 가한 충격은 엄청났다. 그는 실제 남녀를 등장시켜 성 행위와 자위 장면을 연출했고, 당연히 남녀 성기까지 영상에 담았다. 성 반응의 차이 등 기술적인 정보도 제공했다. ‘데일리 메일’ 같은 일부 언론은 “가장 명쾌하고 진솔한 학교 교재용 필름”이라고 썼다. 한편 여성운동 진영도 ‘반(反) 마틴 콜’진영에 섰는데, 콜의 비디오가 출산에서 여성을 수동적 주체로 묘사해서였다. 텔레그래프는 콜이 자신의 비디오를 두고 반성했던 유일한 결점이 그것이었다고 썼다.

38년 뒤인 2009년 작가 겸 영화평론가인 피터 브래드쇼(1962년생)는 가디언 칼럼에서 콜의 비디오를 역대 모든 성교육 영상 자료 가운데 “의심의 여지 없는 최고의 역작”이라 썼다. 브래드쇼는 세상이 달라져 성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청소년들에게 성을 가르쳐 줄 영상교재는 도대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때가 되면 내 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마틴 콜의 ‘Growing up’을 챙겨둬야겠다.”(09.2.11)

마틴 콜은 1931년 10월 4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우스햄프턴대학에서 식물학을 전공한 뒤 식물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나이지리아 이바단대학에서 의대생들에게 강의했고, 64년 버밍엄 고등기술대학(현 아스턴대학) 전임강사가 되면서 귀국했다.

“내게 성 고민을 상담하러 오는 대학생들이 꽤 많았어요. 아무래도 내가 생물학자이고 또 젊어서 그랬겠죠.” 대학 내에 보건소가 없어 달리 상담할 곳이 없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이미 성에 대한 그의 개방적 철학과 활동이 꽤 알려졌던 까닭이 더 컸을 것이다. 그는 귀국 직후부터 당시 영국의 주요 현안 가운데 하나였던 낙태허용(Pro-Choice) 운동에 힘을 쏟았고, 66년 무렵에는 낙태법 개정협회 버밍엄지부 의장이 돼 있었다.

영국 의회가 낙태법을 통과시킨 건 1967년이었다. 법이 통과되자마자 콜은 ‘버밍엄 임신 상담 서비스(Birmingham Pregnancy Advisory Service)’라는 단체를 설립한다. 임신 중절수술을 비롯한 성과 임신 전반에 대한 일종의 상담센터였는데, 당연히 나이와 신분,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성 교육 및 연구협회(Institute for Sex Education and Research)’라는 것도 만든다. 상담센터 운영으로 확인된 성 현실에 대한 그 나름의 대응인 셈인데, 발기불능 등 성기능 장애를 겪는 남자들에게 여성 대리파트너(Surrogate Partner)가 신체적인 자극을 가해 발기력을 향상시켜주는, 수공업적(?) 성 클리닉이었다. 발기불능의 95%가 심리적 원인 즉 경험 부족과 자신감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시대였다.

그의 클리닉 소식은 여성잡지 등에 실렸고, 대리파트너 모집도 그 경로로 이뤄졌다. 그는 세상의 눈초리를 의식해 “대부분 30~45세 여성이었고, 50대도 있었다. 다들 썩 매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물론 ‘세상’은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1966년은 미국의 산부인과 의사 윌리엄 매스터스(William Masters)와 임상심리학자 버지니아 존슨(Virginia Johnsion)의 책 ‘인간의 성적 반응(Human Sexual Response)’이 출간된 해였다. 직업 여성과 자원자 등을 모집해 1만여 회에 걸친 성행위를 관찰하고, 심전도와 뇌파 등을 측정해 성적 자극과 흥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분석한 기념비적인 섹스 임상 연구서였다. 70년 그들은 ‘인간의 성기능부전(Human Sexual Inadequacy)’도 출간했다. 조루 발기부전 불감증 성욕 감퇴 등을 객관화해 의학적 질환으로 규정한 데서 나아가 그들은 실험으로 효능을 본 치료법도 제시했다. 그 치료법들 가운데 일부는 ‘매스터스- 존슨 요법’이란 이름으로 지금도 활용되고 있고, 콜의 클리닉 처방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였다.

매스터스와 존슨 보고서는 영국에도 전파됐다. 오르가슴 신화가 증폭되면서 여성이면 누구나, 적절한 자극만 주어지면 오르가슴을 느낀다는 식의 정보들이 여성지 등을 통해 유포됐고, 콜의 클리닉을 찾는 커플이나 여성 고객도 늘어났다. 그는 남성 대리파트너도 고용해야 했다.

1993년 인디펜던트 인터뷰에서 그는 “매스터스 존슨 요법에 따라 일정 기간 성행위를 금함으로써 성적 압력을 고조시키는 방법도 써보고 관능 마사지법 등도 써봤지만, 그들의 보고서(성 트러블 커플에게 2주간 실험한 결과 80%의 치유율을 보였다고 기록)가 밝힌 성공률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그럴 때는 현실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남녀관계에는 섹스보다 더 중요한 것들도 있다고 상담했다. 하지만 파트너 중 한쪽에게 섹스가 너무나 중요하다면 어쩌겠는가? 갈라서야지”라고 말했다. 그 한계는 물론 시대의 한계였다. 그는 그 한계와 맞서며 등 뒤의 적들과도 싸워야 했다.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은 그가 매매춘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며 툭하면 고발했다.

마틴 콜의 아버지는 은행원이었는데, 고루하고 엄격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와의 불화(의 기억)도 그가 성을 무기로 세상(의 권위와 전통)과 맞서고, 위선에 저항하게 한 동력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나를 모종의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했던” 부모님의 억압적 가치에 대한 반발심이 자신을 성과학자로 이끈 힘 중 하나라고 말했다.(텔레그래프, 15.6.22)

콜은 88년 은퇴했다. 92년 인터뷰에서 그는 “10년 전과 비교해서 과연 인간이 더 행복해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성생활에 관한 한, 훨씬 풍요로워졌다. 성적인 방종과 그로 인한 가정 파탄도 물론 문제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지금도 내겐 고객들의 감사 편지가 한 무더기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들에게 감사 받을 만한 남자는 못 됐던지, 세 번 결혼하고 다섯 아이를 두고 세 번 이혼했다. 마틴 콜은 6월 2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그는 다양한 상담ㆍ클리닉 경험을 토대로 쓴 에세이 ‘Fundamentals of Sex’(1973)와 ‘Why It Goes Wrong and What You Can Do About It’(1989) 등 두 권의 책을 남겼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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