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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차줌마’는 못 되더라도…“삼식이는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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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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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퇴직예정자들 요리교실 열기

쇠고기 전골부터 샐러드까지

“해보니 재밌고 자신감 생겨”

“가족들에 평생 처음 음식해줘”


* 삼식이 : 퇴직후 집에서 삼시세끼 요구하는 남편

“나중에 나 아프면 어떡할 거야? 밥하는 것 정도는 배워놔야 하지 않겠어?”

평생 라면 말고는 요리를 해본 적이 없다는 전필진(59)씨는 아내의 이 한마디가 가슴에 와 박혔다고 했다. 서울 중랑구 신내2동 주민센터장인 전씨가 은퇴를 앞두고 요리를 배우기로 결심한 이유다.

지난달 30일 오후 중랑구의 한 대형마트 문화센터에서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성 10여명이 알록달록한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 강좌를 듣고 있었다. 중랑구청이 3년 이내 퇴직 예정인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개설한 6주짜리 프로그램이다. 참가자들은 매주 요리 두 가지씩을 배운다. 이날 이들이 배운 것은 쇠고기와 채소로 만드는 전골요리 ‘밀푀유 나베’, 사과와 견과류 등을 이용한 ‘월도프 샐러드’다. 손님을 대접하기에 안성맞춤인 요리들이다.

강사인 신성숙 한국음식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이 시연하면서 “육수에서 다시마를 건져낸 다음엔 어떻게 해야 될까요”라고 물었다. 평균 나이 58살인 수강생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답을 하지 못하면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직접 실습을 하는 순서가 되어서야 아저씨들의 말문이 열렸다. “선생님이 칼로 자른 부분이 위로 향해야 보기가 좋댔잖아.” “에이, 맛있으면 됐지 뭐.”

보통 퇴직 예정자 교육은 은퇴 뒤 창업이나 재취업 등 경제활동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이 교육은 은퇴 뒤 가정에 잘 적응하는 것을 돕는 데 목적이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5월 67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퇴직 남성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60대 후반(35.3%)에서 최근 1년간 부부 간 갈등을 겪었다는 비율이 가장 높았다. 부부 갈등의 원인도 성격(20.1%)이나 생활방식(19.5%)이 경제적 이유(17.9%)보다 컸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 갑자기 길어지면서 전엔 도드라지지 않던 갈등 요인이 부각되는 것이다.

그 중심에 ‘밥’이 있다. 종일 집에 있으면서 ‘삼시 세끼’를 요구하는 퇴직 남편을 아내들은 ‘삼식이’라고 부른다. 배우 차승원씨처럼 요리 잘하는 남자들이 ‘요섹남’(요리 잘하는 섹시한 남성)이라고 불리며 인기를 얻는 것과 대비된다.

“솔직히 차승원 같은 남자를 보면 부럽긴 하지만 따라해볼 엄두도 못 내요. 그래도 요리를 배워 한 번이라도 밥을 차려주면 ‘삼식이’ 소리는 듣지 않겠죠?” 최경현(58)씨가 한껏 자신감에 부푼 목소리로 말했다. 요리를 처음 해본다는 기동호(58)씨는 “요리 솜씨로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준비중”이라고 했다. 평소 아내한테서 라면도 못 끓인다는 핀잔을 듣던 장태섭(58)씨는 지난주에 배운 열무국수와 수박화채를 직접 만들어 아내와 두 딸, 사위에게 대접했다고 한다. “평생 처음으로 음식을 해줬는데 다들 맛있다고 해요.”

삼식이 아저씨들이 모두 활짝 웃었다.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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