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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흰 천과 바람만 있음 어디든 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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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울진)=김아미 기자]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기억하는지, 이 대사. 벌써 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손발을 오글거린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요트 타는 재벌남 배우 김현중은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이렇게 말했다. 드라마는 끝났어도 명대사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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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바다는 요트, 윈드서핑, 스쿠버다이빙 등 해양레저스포츠를 즐기기에 좋은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매년 코리아컵 국제요트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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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질색하며 빠져드는 대사이기도 했다. 비현실적일만큼 낭만적이었으니까. 꽃보다 아름다운 남자와 함께 요트. 죽기 전에 해야 할 버킷리스트에나 넣어 놓고 거들떠보지 않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 속 주인공이 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 경상북도 울진에서는 말이다.

드라마처럼, 흰 천, 바람, 요트, 그리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구릿빛 피부의 마린보이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 이것만으로도 울진에 가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를 굳이 찾을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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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포항의 저녁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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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에 도착한 날은 여덟번째 절기에 해당하는 소만(小滿)이었다.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생장해 가득 찬다’는 때. 1년 중 가장 사랑스러운 날씨. 바람 한 줌, 햇살 한 줄기에도 ‘썸’타는 아가씨처럼 설레는 계절이다. 썸머(Summer), 썸(Some). 발음이 비슷한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을 것이다. 유독 여름은 그 무엇인가와 썸을 타도 좋을만큼 의욕이 넘치게 만든다.

▶바람과 썸 타다 =그새 낮 기온이 30도를 웃돌았다. 바다로 나가기엔 더없이 좋았다. 게다가 울진 바다는 요트, 윈드서핑, 스쿠버다이빙 등 해양레저스포츠를 즐기기 좋은 곳으로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국내 최대 대게잡이 항구로 유명한 울진 후포항에는 울진군요트협회가 상주하고 있다. 관광객들을 위한 요트투어 뿐만 아니라 매년 6월부터 9월까지는 요트학교를 열어 전문적인 강습도 해 준다.

일행들과 함께 요트 한 척을 빌려 강습을 받기로 했다. 교육을 맡을 선장님이 나섰다. 물론 구릿빛 마린보이들도 함께였다. 갈색머리 휘날리는 꽃남(?)은 아니었지만.

“이걸 세일(Sailㆍ하얀 천)이라고 해요. 앞에 있는 건 집세일(Jib sail), 돛대 뒤에 붙은 있는 건 메인세일(Main sail). 지금은 엔진을 1단 켰는데, 엔진까지 꺼버리면 배가 안 나가요. 추진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서 45도 각도로 가는 겁니다. 세일에 바람이 받을 수 있도록 말이에요. 저기 저 쪽을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어요?”

“….”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일단 가요. 그리고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 방향 45도로 지그재그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가는 거에요. 요트에서 이렇게 방향 전환하는 것을 태킹(Tacking)이라고 해요. 저기 저 쪽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

“이해 안되세요? 초등학생들은 금방 알던데.”

요트에서의 대화다. 자동차 핸들 돌리는 것이나 요트 방향키 돌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바람과 썸 타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선장님이 “저쪽으로 가 보라”며 손가락으로 가리 킨 방향으로 가기는 커녕 배는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그러다 해가 졌다. 낙조로 붉게 일렁이는 바다 한 가운데 떠 있으니 요트에서 내리기가 싫어진다.

문득 궁금해졌다.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정말 어디든 갈 수 있나. 선장이 답했다.

“물 속에 들어가 있는 요트 정중앙에 킬힐이라는 납덩어리가 있어요. 이 배 무게가 9.5톤, 킬힐 무게가 2.5톤 이상. 원리는 오뚜기랑 똑같아요. 오뚜기가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요트도 바람을 맞고 파도가 쳐도 기울어지기만 하지 넘어가진 않아요. 그래서 이런 요트를 타고 세계일주가 가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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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 자락 북동쪽 사면의 바위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좁고 긴 계곡이 신선계곡이다. 계곡 트레킹을 하면서 곳곳에서 깊은 용소를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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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과 썸 타다 =일행을 울진으로 안내한 길라잡이는 울진 계곡의 매력을 설파했다. “너무 좋은데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여전히 맑고 깨끗하다고.

그래서 나섰다. 계곡트레킹. 신선계곡, 대왕금강송, 왕피천이 대표적인데, 이 중에서 두 곳을 트레킹 코스로 택했다. 신선계곡과 왕피천이다.

신선계곡은 울진 남쪽, 백암산 자락 북동쪽 사면의 바위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좁고 긴 계곡으로, 총 거리는 6㎞ 정도다. 산이 높아 계곡이 깊고, 계곡이 깊어 물도 맑다. 이 계곡길을 따라 크고 작은 200여개의 물웅덩이(沼ㆍ소)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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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궈보지 않는 건 계곡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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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데크로 만든 탐방로를 따라 걷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계곡을 따라 소를 따라 걸으며 두 개의 출렁바위를 건넜다. ‘참새 눈물나기’, ‘다람쥐 한숨제기’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깎아지른 바위 절벽들도 지났다.

초록빛 낮은 소가 있는가 하면 검푸른 빛을 띄는 깊은 소가 있었다. 생긴 모양에 따라 이름도 가지각색이다. 함박꽃나무가 많은 곳이라서 함박소, 곡식 찧는 방앗간의 호박을 닮았다 해서 호박소다. 특히 호박소는 명주실 한 꾸러미를 다 풀어 넣어도 모자랄 정도로 깊다는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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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트레킹 도중 만나는 독특한 모양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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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소엔 ‘용소(龍沼)’라는 이름이 붙는다. 용소라는 이름이 붙은 깊은 못에는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꼭 있다. 이곳 용소는 옛날 가뭄이 심할 때 돼지나 양의 머리를 잘라 그 피를 소 주변에 뿌리면서 제사를 지낸 곳이란다.

신선계곡은 누구나 산책하듯 다녀올 수 있는 코스였다면, 왕피천은 조금 더 난코스였다.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왕피천은 원시 비경에 가까웠다. 그런 계곡과 썸을 타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 제대로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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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소 위에 있는 출렁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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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군 서면을 거쳐 동해로 흘러드는 60.95㎞ 물길. 산과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S자로 휘어지는 계곡을 따라 모래톱, 자갈톱을 밟았다. 두어시간 동안 바위와 바위를 뛰어넘고 계곡을 건넜다. 특히 곳곳에 수심 깊은 곳이 있어 바지를 걷어 올린 게 소용이 없었다. 허벅지까지 물에 젖었다. 아예 다 젖을 생각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 깊이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곳들이 많아 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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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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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천에서 가장 깊은 용소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용소 앞까지 가려면 계곡물을 건너야 하는 데 이곳도 수심이 깊고 유속이 빠르다. 그래서 이 구간만큼은 생태탐방로로 우회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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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소에서 바라본 출렁다리.왕피천 물길따라 트레킹 가는 길.왕피천 트레킹 중에도 사람 키는 족히 되어 보이는 깊이의 계곡물을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다. 그 중 용소는 수심이 10m 정도로 왕피천에서 가장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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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썸 타다 =울진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스킨스쿠바였다. 스노클링 몇번 해 본 경험으로 스킨스쿠바에 도전했다.

울진해양스포츠센터(매화면 오산리)는 스킨스쿠바 전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다이빙전용 풀장의 수심이 5m에 달한다. 수량 크기로 아시아 최대 규모란다. 스쿠바다이빙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론, 장비소개, 잠수풀 체험다이빙을 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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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천 맑은 물에는 어른 손가락만한 물고기들의 쉽사리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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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복을 입고 그 위에 수트를 입었다. 5㎜ 두께의 웻수트(Wet suit)다. 수트 속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는 드라이수트(Dry suit)와 달리, 수트 사이로 들어온 물을 체온으로 덥혀 따뜻하게 유지하는 게 웻수트의 원리다.

코까지 막는 물안경(마스크)을 뒤집어 썼다. 긴장한 탓에 콧김이 올라와 안경에 자꾸만 서리가 꼈다. 누군가 옆에서 안경에 침을 살짝 뱉은 후 닦으면 ‘단백질 코팅’이 된다고 귀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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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톱, 자갈톱을 밟다 때론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계곡을 건너기도 한다. 하상이 완만해 물길을 따라 걸어도 크게 힘들진 않지만 수심이 꽤 깊은 곳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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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공기통을 매고 호흡기를 물었다. 10㎏이 넘는 웨이트(Weight) 벨트를 맸다. 가라앉기 위해 몸에 무게를 싣는 것이다. 오리발(핀)까지 신었다.

물의 표면에 떠 있는 것과 물 깊은 곳으로 잠수를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수중 압력 때문이다. 귀에 압착이 느껴지면 반드시 ‘압력평형(Equalizingㆍ이퀄라이징)’을 해야 한다. 코를 꽉 막은 채 코를 풀 듯이 힘을 줘 귓속을 누르는 압력을 뚫어 내는 것이다. 차분하게 입으로만 호흡하면서 이퀄라이징을 하면 4~5m 정도는 어렵지 않게 내려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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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스쿠바다이빙 실전에 임하기 전 수영장에서 기본적인 트레이닝을 받는 것이 좋다. 울진해양스포츠센터는 수심이 5m에 달하는 국내 최대 다이빙 전용 풀장을 갖추고 있는 스킨스쿠바 전문 교육센터다. [사진제공=리에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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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물을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했다간 1㎝도 내려갈 수가 없다. 호흡기를 물었는데도 숨을 쉬기가 힘들어진다.

첫 잠수를 하자마자 물 위로 올라왔다. 마음의 준비가 덜 된 탓이다. 두번째 내려갔을 땐 호흡이 안정됐다. 이퀄라이징도 어렵지 않았다. 아! 바다로 가도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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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바다에서 스킨스쿠바를 하는 모습. [사진제공=리에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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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로 나갔다. 배를 모는 선장님이 그제서야 말씀하신다. 사실 스쿠바다이빙을 하기엔 지금이 가장 안 좋은 계절이라고. 가장 좋은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때라고. 그때가 바닷속은 여름이라고.

얼음장처럼 추운 5월의 울진 바닷속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의 공포가 또다시 엄습해왔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보트에 매단 줄을 붙잡고 조금씩 내려갔다. 연습한대로 이퀄라이징도 성공했다. 조금 더 내려가보고 싶었다. 잠수를 도와준 강사가 단호하게 “노(No)” 신호를 준다.

바다와 썸 타는 것은 사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다는 여전히 무서운 존재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친해질 것이다. 바다와 친해지면, 세상엔 더이상 두려울 게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문득 또 궁금해졌다. 영화 ’그랑블루‘의 대사처럼 “바다 끝까지 내려가면 바다는 더 이상 푸른 빛이 아니고 하늘은 기억에서만 존재”하는지. 그 아득한 평온에 닿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말이다.

글·사진=김아미 기자/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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