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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脈을 잇다] 어머니께 배운 기술, 그건 한복에 쏟는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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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짓기 50년 名匠 박태복]

원단 공정부터 바느질까지 손수… 곤룡포·당의 등 복원해 전시도

"티 안 나는 공정도 생략해선 안 돼… 그 정성이 우리 전통 의상 지켜"

박태복(67)이 만든 한복은 울지 않고 구김이 적기로 유명하다. 마름질에 앞서 원단에 수차례 풀과 물을 뿌리는 공정 때문인데, 이 일에만 수일이 걸린다. "새 기술이 아니라 50년 전 어머니께 배운 거예요. 정성을 쏟은 만큼은 티가 나지 않아서인지 요즘엔 이 원칙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요."

한복도 저가(低價) 중국제를 수입하는 시대에 원단 처리부터 바느질까지 직접 다 하는 이는 드물다. 대구 이천동 박태복한복연구원에서 만난 그는 "그러니까 더 정성을 다해야 우리 전통 의상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박태복은 배냇저고리, 원삼(圓衫·부녀자 예복), 폐백용 활옷뿐 아니라 조선 임금의 곤룡포, 왕후의 당의, 문무백관의 관복 등 우리 전통 의상을 복원해 전시하는 활동도 꾸준히 벌여오고 있다. 그는 2011년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됐다.

조선일보

한복 명장 박태복(오른쪽)씨가 딸 정희정씨와 함께 자신이 복원해 만든 곤룡포(袞龍袍)와 당의(唐衣) 앞에 나란히 섰다. /김충령 기자


한학자였던 조부는 집안 제사는 물론 지역 향사(享祀)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도포 자락이 멋지게 휘날렸어요.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죠." 어머니는 대가족의 옷을 직접 만들었다. 봄가을의 무명옷, 여름철 모시옷, 겨울 핫옷까지 만들 때 그는 옆에서 종이로 마름질을 했다. "열두 살 때 처음 동생 한복을 만들었는데, 할아버지는 손녀가 직업적으로 옷을 만들까 봐 못하게 하셨어요. 한밤에 포대기로 창(窓)을 막고 몰래 지었어요." 결국 조부도 한복 배우는 것을 허락했다. 조건은 '남의 일을 하게 되면 정성을 다하고, 절대 과도한 이문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

22세 때부터 4년간 양장점 재단사로도 일했지만, 그때도 일 마치면 집에 와 어머니에게서 한복을 배웠다. 어머니는 소문 듣고 찾아온 손님들 한복을 지었다. 이웃은 돈 대신 모를 심고 밭을 갈아주기도 했다. "손님 옷을 뛰어넘지도 못하게 하셨어요. 경사에 입을 옷이니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것이죠." 박태복은 어머니뿐 아니라 전국의 이름난 장인을 찾아가 기술을 배웠다. 무형문화재 침선장, 출토복식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전통 복식 재현에 꾸준히 노력했다. 평면 재단인 한복은 앞과 뒤의 품이 같다. 박태복은 품이 다른 입체 재단으로 곡선을 살려내는 '비대칭 기법'으로 특허도 받았다.

열다섯 평 박태복한복연구원은 1993년 문을 열었을 때 크기 그대로다. 혼자서 전 과정을 직접 하니 규모를 키울 수 없었다. 보통 한복 집보다 원가가 서너 배 들고 시간도 훨씬 더 걸렸다. 딸 정희정(39)은 이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 눈에도 돈 버는 길이 훤히 보이는데, 엄마만 모르나 싶었다. 대학도 공대로 갔다.

"15년 전입니다. 일손이 부족해 고생하는 엄마를 도우려고 대구에 내려왔어요. 그제야 엄마가 어떻게 한복을 짓는지 자세히 보게 됐어요. 원단에 풀을 입히는 공정을 생략해도 당장엔 티 나지 않습니다. 내가 한 번 만들어보고 '잘 안 된다'고 하면 '열 벌, 스무 벌 만들어봐라. 그래야 숙련된다'고 하셨어요. 한복을 입어보고 엄마한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손님들을 보고 깨달았어요." 정희정은 돌아가 대학원 의상학과에서 복식사를 전공했다. 현재 어머니와 함께 한복을 만들며 대학에서 한복 강의를 한다.

예전엔 결혼하면 고모·이모까지 한복을 해줬는데, 요즘엔 신랑도 잘 안 입는다. 대학에선 한복 관련 학과들이 줄줄이 사라지고 있다. 딸이 말했다. "저도 고민 많아요. 이렇게 빠른 세상에 정성이 뭐 중요하냐 하겠지만, 엄마의 한복 만드는 모습에 서서히 빠져버렸나 봐요. 이젠 엄마 뒤를 이어 한복을 지을 수밖에 없겠다 싶어요."







[김충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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