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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그라운드의 이방인’ vs ‘파울볼’, 영화보다 영화같은 제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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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영화가 될까 싶었죠.” (‘그라운드의 이방인’ 양시철 씨)

“영화가 완성된 것 자체가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파울볼’ 김성근 야구감독)

다큐멘터리의 묘미는 여기에 있는 지 모른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이고 되짚기 머쓱한 과거가 다른 누군가에겐 위안과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 덧붙여 다큐 영화는 극 영화와는 차별화된 강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연기상 트로피를 휩쓴 배우가 열연해도 연기는 어디까지나 연기일 뿐. 당사자가 덤덤하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는, 오랜만에 집밥을 먹는 것처럼 소박하지만 따뜻한 감상을 준다.

프로야구 시즌 시작을 전후해 두 편의 다큐 영화가 등장했다. 잊혀진 재일동포 야구 소년들을 조명한 ‘그라운드의 이방인’(감독 김명준ㆍ제작 ㈜인디스토리), 김성근 감독과 고양 원더스의 뜨거웠던 3년을 담은 ‘파울볼’(감독 조정래,김보경ㆍ제작 티피에스컴퍼니)이다. 스크린 속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정말 영화가 되겠느냐며 의아해 한다. 비슷한 의구심을 관객들도 품었을 지 모른다. 다큐멘터리도 야구도, 접근하기 쉬운 장르와 소재는 아닌 탓이다. 물론 영화를 보면 장르와 소재는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에서도 고국에서도 ‘이방인’일 수 밖에 없는 재일동포들의 애환, 낙오자 딱지를 떼기 위한 선수들의 고군분투는 그 자체로 가슴 먹먹하다. 우여곡절 많았던 제작 과정도 극 영화 이상으로 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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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영화가 돼?”, ‘그라운드 이방인’ =누적관중 1억 명을 자랑하는 국민 스포츠 프로야구. 한국의 프로야구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까지, 그 과정엔 재일동포 학생 야구단의 숨은 활약이 있었다. 정부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 한국 야구의 발전을 위해 재일동포 야구단을 초청해 경기를 갖기 시작했다. 모국 방문 초청 경기는 거의 40여년 간 이어졌고, 이들의 선진야구 기술과 장비가 자연스럽게 전파됐다.

재일동포팀의 족적을 대중은 물론, 야구계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재일동포는 관심 밖 대상이거나 친북 혹은 북한 국적, 심지어 ‘반(半) 쪽바리’일 뿐이었다. 1982년 봉황대기 고교야구 경기에 참여한 재일동포 학생 야구단 역시 고국 동포들의 냉대와 야유에 맞닥뜨렸다. 그럼에도 이들은 조국의 햇빛과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라운드를 내달렸다. 까까머리 소년들은 어느덧 희끗한 머리의 중년이 되어 카메라 앞에 섰다.

김명준 감독은 ‘600여 명의 재일동포 학생 야구인들이 한국 야구사에서 영영 잊혀질 수도 있다’는 말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이들을 찾아나섰다. 제작팀이 최초로 취재를 시작한 건 2010년 5월, 본격적인 촬영 준비에 돌입한 건 2011년 새해를 맞은 뒤였다. 그러던 중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사태가 벌어지면서 촬영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한동안 김명준 감독은 대지진 피해를 입은 조선학교와 재일동포 사회를 돕는 일에 몰두했고, 2012년 8월이 돼서야 ‘그라운드의 이방인’의 공식적인 첫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재일동포들이 매체 노출을 꺼려한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이 공공연히 알려지면 일본땅에서 싸늘한 시선과 처우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재일동포들은 고국에서도 이방인이지만, 일본에서도 역시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또 한국의 방송과 영화 제작자 등을 사칭해 사기를 당한 동포들의 사례도 있어, 그들에게 신뢰를 심어주는 것 또한 제작팀의 몫이었다. 영화를 찍는다는 말에 반신반의했던 재일동포들은 차츰 경계심을 풀고 묵혀둔 이야기를 털어놨다. 10대 시절 함께 그라운드를 달렸던 동료들과 소주잔을 부딪히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마지막 과제는 이들을 32년 만에 고국의 마운드에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멤버들을 프로야구 시구 무대에 올릴 수 있을 지 확신이 없었다. 시구의 성사 여부를 두고 고심했던 제작진은 ‘불가능하면 불가능한대로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촬영을 이어갔다. 결국 야구 인맥을 총동원한 제작진의 노력과 한 때 프로야구에서 명성을 떨친 투수 임호균 씨의 도움으로 두산 베어스의 프론트를 움직일 수 있었다. 결국 주인공들은 30여 년 만에 마운드에 다시 섰고, 관중들의 환대에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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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해체, 전화위복 된 ‘파울볼’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다. 구단에서 방출된 선수, 전직 대리운전 기사, 헬스 트레이너 등 다양한 사연과 경력을 지닌 이들은 실력도 체력도 형편 없었다. 고양 원더스의 훈련을 지켜보는 ‘야신’ 김성근 감독의 얼굴은 어두웠다.

김성근 감독이 내린 처방은 오직 훈련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김성근 표 ‘지옥의 펑고(수비 연습을 위해 공을 직접 쳐주는 것)’는 고양 원더스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선수들의 온 몸은 파스로 도배를 했고, 손바닥은 물집이 터져 성한 곳이 없었다. 결국 고양 원더스는 창단 3년여 만에 90승25무61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총 31명을 프로구단에 진출시키는 기적 같은 성과도 일궈냈다.

‘파울볼’의 공동연출을 맡은 조정래, 김보경 감독은 2011년 고양 원더스가 창단할 때부터 카메라를 들었다. 심지어 김보경 감독은 김성근 감독이 화장실을 갈 때도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다. 구단 해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선수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그들과도 오랜 시간 동고동락한 덕분이었다. ‘파울볼’ 팀은 촬영을 하든 안 하든 선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들보다 늦게 퇴근했다. 김성근 감독도 촬영팀이 익숙해지면서 이들을 원더스 직원처럼 생각하고 그라운드 안으로 불러들였다.

“원더스 선수들은 진짜 열심히 해요. 누구 하나를 집어 말할 수 없이,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할 수 있을까?’ ‘숨도 안 쉬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늘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김보경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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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감독이 감기몸살 때문에 꼼짝 없이 누워 계시다가도 일어나서 펑고를 계속 치는 모습을 봤어요. 원더스는 처음에는 외인구단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김성근 감독과 혼연일체를 이루면서 외인구단화 됐어요. 모든 구단에서 버렸던 선수들이 한계를 뛰어넘기 시작한 거죠.”(조정래 감독)

2014년 9월 11일, 구단의 갑작스러운 해체 소식에 순조롭던 촬영은 위기를 맞았다. “여기서 끝이구나. 절망적이다.” 김보경 감독은 망연자실했다. 애초에 영화는 고양 원더스의 창단 취지와 같은 맥락에서 ‘패자부활’의 메시지를 담으려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구단 해체라는 변수와 맞닥뜨리면서 영화는 완성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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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촬영팀을 일으켜 세운 건 원더스의 선수들이었다. 이들은 동료들을 프로구단으로 먼저 떠나보내고, 구단 해체로 갈 곳까지 잃은 상황에서도 늘 하던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엔 온갖 상념들이 뒤엉켜있을 지 모르지만, 적어도 두 팔은 공을 던졌고 두 다리는 운동장을 달렸다. 숱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이들은 “언제든지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파울볼’의 의미를 몸소 체득했던 것이다.

이혜미 기자/ha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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