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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관광 여수] 500년 동안 나라 방어하던 해군기지의 흔적이 살아 숨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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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광장(전남 여수시 중앙동)에 온 관광객들은 모형거북선에 어김없이 오르고 있었다. 35.3m 길이, 10.6m의 높이로 만들어진 2층구조의 거북선에는 좌우에 각기 6개의 포와 8개의 노가 설치되어 있었다. 거북선 내부로 들어선 이들은 신기한 듯 둘러보았다. 경기도 파주에서 온 40대 박씨 부부는 "봄소식이 먼저 전해져오는 남쪽 여수를 찾아왔다"며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도 둘러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 부부의 뒤를 이어 서울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들어섰다. 광장 한 쪽에는 용(龍)처럼 긴 형상을 한 전망대, 임란 당시의 상황을 비롯 이순신장군과 지역민들의 활약을 새긴 석판이 있었다. 뒤편에는 바다를 호령하는 이순신장군상(像)이 서 있다. 이순신은 동북아대전쟁 임진왜란이 터지기 14개월전인 1591년 2월, 우의정 겸 이조판서 유성룡의 천거로 7품계를 뛰어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다.

조선일보

전라좌수영 본영 앞에 조성된 이순신 광장. 이곳에 있는 모형 거북선이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어떻게 수군들이 거북선을 움직였는지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김영근 기자


광장을 거슬러 올라가면 진남관(鎭南館). '남쪽(의 왜)를 진압한다'는 뜻을 가진 이 객사는 단층 목조건물로는 가장 크다는데,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국보 제304호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이었다. 국가와 민족의 명운을 놓고, 이 장군은 1592년 5월 4일(임진왜란은 4월 13일 발발) 첫 출전에 나섰다. 서울은 전날 함락되었다. 함선은 좌수영 여수를 출발, 경상앞바다 거제도로 향했다. 조선의 연합함대로서 옥포(거제도), 합포(진해), 적진포(고성)에서 승리하고 여수로 돌아왔다. 2차출전에선 사천, 당포(통영), 당항포(고성), 율포(거제도)에서 일본수군을 물리쳤다. 해군의 승리와는 달리 평양성이 이어 무너졌다. 7월엔 3차 출전, 한산도(통영), 안골포(창원)에서 대첩을 거두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해전을 포기했다. '서해를 통해 10만의 수군이 올라오게 한다'는 일본의 전략은 저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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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는 전라좌수영이 있었다. 좌수영터 한 가운데에는 남해를 내려다 보는 진남관이 자리하고 있다. /김영근 기자.


진남관 입구에 있는 유물전시관. 관광해설가 명호운씨가 안내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지난 500여년 동안 군사도시였습니다. 나라를 방어하는 해군기지가 있었던 곳입니다."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대안학교 로드스꼴라 학생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익종(14)학생은 "여행하면서 역사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오세연 인턴교사는 "이곳 여수에서 2박3일간 머물면서 두루 살펴보려고 한다"고 했다. 또 다른 해설가 김양의씨는 "평일에는 보통 200여명, 주말에는 500여명씩 이곳 전시관을 찾고 있다"며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온다"고 말했다. 방문일지를 보니 서울, 대전, 부천, 전주, 창원, 부산 등 다양했다.

최근 이처럼 이순신 유적지를 찾는 발길이 많아지면서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장군 유적지 곳곳에서 관광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장군과 관련한 유적지는 곳곳에 있었다.

이 장군은 첫 출전 전날 최초 탈영자의 목을 베어 매달았다. 그곳이 진남관에서 지척인 고소대. 지리를 조망하고 군사들을 지휘하는 곳이었다. '도망자는 사형'이라는 군율을 그대로 시행했다. 뒷날 이 장군의 부하들은 이 장군의 승전사실들을 눈물을 흘리며 비에 새겼다. 그게 타루비(보물1288호)다. 고소대에 있다. 승전을 기록한 비(통제이공수군대첩비, 보물 571호)도 서있다. 이 장군을 기리는 지역사람들의 애틋한 사랑은 그지 없었다. 두 비를 일제강점기 일제가 뽑아 서울 경복궁에 가져다 놓았던 것을 해방 직후 여수와 해남사람들이 찾아왔다. 스님들은 이 장군을 기리는 절을 전란이 끝난 다음 해인 1599년 세웠다. 1601년엔 그를 기리는 사당(충민사)도 세워졌다. 사당 이름을 선조가 짓고 썼다. 진남관 바로 몇분 거리에 석천사, 충민사가 있다.

임란 당시 수군이 쓰던 판옥선과 구선(거북선) 등 전선을 제작했던 곳으로 알려진 선소(船所). 여수시청 뒤편 바닷가에 있다. 고려시대부터 배를 만들어오던 곳이었다. 충무공의 효심은 지극했다. 전란중에도 어머니를 여수에 모셨다.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에 그 자리가 전한다.

임란 초기 조선 해군의 승리는 패망직전 나라의 역전을 가능케 한 발판이었다. 그러나 이 장군의 자리는 선조에 의해 원균에게 넘어갔다. 1597년 7월 원균 삼도수군통제사가 지휘했던 칠천량(거제도)해전에서 조선수군은 참패했다. 백의종군중이던 이 장군은 참패 6일만에 선조에 의해 다시 통제사로 부임, 두 달 뒤 명량(해남~진도)해전에서 결정적인 대역전을 이루었다. 이듬해 패퇴하는 일본군과 벌인 노량(하동~남해)해전에서 최후를 마쳤다.

[여수=권경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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