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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무대에서 폭발하는 ‘센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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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토요판] 안인용의 미래TV전략실

이미지나 스타일을 말할 때 쓰는 말로 ‘센캐’라는 단어가 있다. ‘센 캐릭터’의 줄임말이다. 남자의 경우 육체적인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자, 혹은 그렇게 보이고 싶어서 가죽 재킷을 입고 아이라인을 짙게 그리는 자를 말한다. 가죽 재킷과 아이라인은 남녀 공통이지만, 여자의 경우 ‘세다’는 말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 힘은 자기 모습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멘탈의 힘을, 싸움은 주로 여자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깔보거나 우습게 여기는 제스처로서의 기싸움을 말한다. 이런 센캐의 여자를 ‘센 언니’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부르는 사람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진다. ‘멋지다’는 찬사가 되기도 하고, ‘질색이다’라는 거부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센 언니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제법 자주 볼 수 있는 꽤 고전적인 캐릭터지만 무대에서는 좀처럼 보기가 쉽지 않다. 3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주어지는 무대에서 센캐를 제대로 폭발시키려면 음악과 몸짓, 패션에 에너지까지 제대로 갖춰야 하는데 지금의 아이돌 시장에는 이를 모두 소화해낼 만한 재목이 별로 없다. 소화할 수 있다고 해도 남성 팬을 등지고 굳이 그 가시밭길을 걸으려는 이는 더욱이 없다. 지난 몇 년 동안은 투애니원이, 아니 리더 씨엘이 센 언니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지만 최근에는 미국 진출과 팀의 사정으로 인해 국내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동안 티브이 가요 프로그램은 온통 ‘청순’과 ‘섹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소녀들로 넘쳐났다. 그런데 요즘 뭔가 달라졌다. 티브이 채널을 돌릴 때마다 센 언니들이 보이고, 또 센 언니 중에서도 새로운 유형이 속속 포착되며, 심지어 이들이 꽤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먼저 자가발전형 센 언니 포미닛이다. 포미닛은 활동한 지 7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색깔이 없었다. 현아는 솔로로 활동하며 ‘빨간색’의 아이콘이 됐지만 그 색깔이 포미닛으로는 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랬던 포미닛이 이번에 ‘미쳐’로 제대로 미쳐서 돌아왔다. 귀에 꽂히는 음악과 ‘블랙 앤 화이트’ 패션, 제대로 리듬을 타는 춤이 잘 맞아떨어진데다 무엇보다 에너지가 다르다. 전지윤이 미국 드라마 <가십걸>의 ‘악녀’ 블레어가 했던 명대사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I’m the crazy bitch around here)를 따온 랩 가사 “I’m the crazy girl around here like gossip girl!”을 쏟아낼 때의 눈빛을 보라. 센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세졌다.

다음은 솔로 앨범을 낸 에프엑스의 엠버다. 짧은 머리에 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엠버는 말과 행동에서 내공이 느껴지는 행복전도사형 센 언니다. 엠버는 항상 웃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얘기한다. <엠넷>의 <4가지쇼>에서 했던 “나는 내가 정말 좋은데 왜 내가 나를 숨기려 하지?” 같은 말들은 기억할 만하다. 물론 지금도 호돌이가 상투 돌리던 시절인 줄 아는 이들은 <진짜 사나이-여군특집2>에서 ‘바느질’이나 ‘설거지’, ‘러브라인’과 이어붙여 ‘엠버도 천상 여자’라는 자막을 쓰고 있지만, 그닥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엠넷>의 래퍼 서바이벌 쇼 <언프리티 랩스타>에 출연하는 제시와 치타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공격형 센 언니다. 제시는 랩을 할 때나 인터뷰를 할 때 날것에 가까운 말들을 던진다. 제시가 세살 많은 타이미를 향해 날린 “유아 낫(You’re not) 내 언니, 언니 아니야”는 어록으로 남길 만하다. 치타가 지민, 육지담과 배틀을 하는 장면도 소장용이다. 치타는 ‘여성 래퍼가 남성 래퍼만큼 하겠냐’에 쏠려 있던 시선을 순식간에 자신에게로, 얼굴이 아닌 랩으로 끌고 왔다. 제시와 치타는 공격적으로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또 그런 무대가 얼마나 짜릿한지 보여준다.

누구나 센캐가 되고 싶어하진 않는다. 원한다고 아무나 센캐가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작든 크든 센캐 하나쯤은 키우며 산다. 그래서인지 센 언니들이 무대에서 에너지를 폭발시키면 그 에너지가 눈과 귀뿐만 아니라 마음속 어딘가를 쿡 찌른다. 이것이야 말로 대중문화가, 또 음악이 줄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자극이 아닐까. 비록 틈새일지라도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야 하는 가요계가 지금 티브이 속 풍경에서 의미있는 힌트를 읽어내길 바란다.

안인용 티브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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