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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취재파일] 셔먼 발언으로 본 '동맹'의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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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의 발언 때문에 한미 외교가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저희도 보도해드렸지만, 발단은 지난달 27일 셔먼 차관이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컨퍼런스에서 한 기조연설이었습니다. 문제가 됐던 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극적인 말들은 진전이 아닌 마비를 초래합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서 과거사를 극복하고 화해의 미래로 나아가자는 취지의 연설이었지만, 이 발언은 한국과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이른바 '값싼 박수'를 받기 위해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있고, 이런 의미에서 도발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과 한국이 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돼 파문이 확산됐습니다.

파문이 커질 조짐을 보이자, 먼저 움직인 건 미국이 아니라 우리나라 정부였습니다. 외교부는 "미국이 한일 과거사에 대한 입장이 바뀐 것은 아니다"라며 진화에 나섰습니다.

그래도 파문이 가라앉지 않자, 미 국무부가 나서서 해명에 나섰습니다. 마리 하프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지난 3일 "특정인이나 특정 국가를 의도한 말이 아니다"라며 긴급 진화에 나섰습니다. 일단, 이로써 큰 불은 끈 셈이 됐지만 한국인으로서 뒷맛은 여전히 개운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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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말 못해도 '동맹'?

제가 외교부에 처음으로 출입하기 시작했던 2013년 12월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을 방한한 조 바이든 부통령은 박 대통령과의 회담 도중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 아니다"라면서, "미국은 계속 한국에 베팅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이 발언도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한 나라 수장에게 중국에 편들지 말라는 노골적인 압박을 한 것으로 해석됐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도 우리 정부가 대신 해명에 나섰습니다. 윤 병세 외교장관은 당시 "한미동맹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베팅한다고 표현한 것 같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처럼 뒷맛은 씁쓸했습니다.

당시 외교부를 처음 출입했던 저로서는 다소 비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우리 정부가 미국에 할 말은 못하고 여론만 무마시키려는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번 일이 우리 국민들의 감정선을 건드렸다면 그건 셔먼 차관의 발언 자체보다, 우리 정부의 이런 무기력한 대응 때문으로 보입니다.

● 미국의 속내는?

사실 미 고위층이 공개석상에서 한 얘기라 속내랄 것도 없습니다. 바이든 부통령이나 셔먼 차관의 발언은 모두 미국이 2012년도에 표방했던 '아시아재균형 정책'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구상의 핵심은, 최근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옛 힘을 유지하기 힘든 미국이 일본의 군사력을 키워 중국을 대신 견제하게 한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 미국 입장에선,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한미일이 강하게 묶여 있어야 하는데, 과거사가 발목을 잡는 겁니다. 일부 미국 고위층은 "일본과 직접 피흘리며 전쟁을 벌인 미국도 다 화해했는데, 한국은 참전국도 아닌데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셔먼이 문제가 된 연설에서 굳이, 2차대전에 참전한 자신의 아버지 얘기를 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바이든이든 셔먼이든,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국의 요구를 밝히는 것은 외교적으로 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중국의 급부상으로 미국의 입장이 그만큼 다급해졌다는 뜻이겠죠.

● 우리나라는 이념논쟁 중

우리나라에서도 때아닌 이념 논쟁이 벌어질 조짐입니다.

얼마 전 아산정책연구원에서 기자들을 상대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제목은 '팍스아메리카나 3.0'. 이 보고서의 요지를 거칠게 정리하면 이겁니다. "경제위기로 무너질 것만 같았던 미국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미국은 강하다. 앞으로 우리의 우방은 중국이 아니라 여전히 미국이어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진영에선 더 이상 미국과의 동맹만 강조하다간 외교적인 실리를 잃고 만다고 주장합니다. 중국도 우리나라에 열심히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시진핑 주석이 중국 수장 중 처음으로 북한보다 우리나라를 먼저 찾은 게 단적인 예입니다.

미국은 저무는 해이고, 중국이 실제로 뜨고 있는지는 더 두고 봐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최근의 상황은 마치 명과 후금 사이에 어떤 외교를 펼칠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던 조선 광해군 시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택한 반면, 이후 반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펼쳤죠. 이후 조선은 두 차례의 호란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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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말 못하더라도…호도하진 말자

물론, 지금의 상황이 당시 조선 상황과 같다고 볼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정부가 왜 미국, 일본 등에 속시원하게 할 말 하는 외교를 하지 못하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은 당시 서인 입장에서 보자면, 속시원한 외교였을 겁니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죠. 현실을 도외시하고 명분이나 여론만 좇는 외교는 국익에 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 정부가 다소 답답하고, 때론 비굴해보이는 대응을 하는 데에도 국익을 위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외교 행위가 여론 조사로 결정되어선 정말 곤란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NO DAYLIGHT'(빛샐 틈 없는 동맹)만 반복하며 국민들을 호도하는 외교도 바람직해보이진 않습니다. 미국도, 일본도, 모두 동맹보다 자기 국익을 앞세워 행동한다는 건 이제 초등학생도 아는 사실입니다.

미국뿐 아니라 우리 국민에게도 할말 하는, 필요하다면 설득하는 외교를 바랍니다. 물론, 당장 입밖에 못낼 상황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실을 호도하는 식의 땜질식 대응만 계속하다간 동맹의 미래도 또 다른 의미로 'NO DAYLIGHT', 그리 밝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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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모 기자 moonj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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