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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트렌드를 마신다… 전통酒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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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그라 요리에

와인 대신 매실주

모로코식 살사에

문배술

신세계백화점

올 설 전통주 매출

작년보다 90% 늘어

조선일보

서울 통의동 ‘7PM’ 인기 메뉴인 ‘스페인 무르시아식 초절임 멸치와 구운 파프리카를 올린 몬타디토’(왼쪽)와는 ‘매실원주’를, ‘모로코식 살사를 곁들인 석화’(가운데)에는 ‘문배술’을, ‘레몬 케이퍼 비네그레트에 버무린 남이탈리아풍 삶은 문어, 돼지감자, 셀러리’(오른쪽)에는 ‘한산소곡주’를 매칭했다. 읽기도 힘들 만큼 낯선 지중해 음식들이지만, 한국 전통주와 서로 맛이 썩 어울린다.


#1: 서울 청담동 밍글스(Mingles)는 예약하기도 힘들다는, 요즘 가장 '핫'한 레스토랑이다. 한식과 양식을 조합해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이 식당에서 저녁식사 때 전채로 내는 푸아그라(거위 간) 요리에는 와인 대신 국내에서 생산된 '매실원주'가 곁들여진다. 뿐만 아니라 푸아그라 자체를 매실주에 재워 요리한다. 이 식당 오너셰프(주인 겸 주방장) 강민구씨는 "원래 소테른 등 단 와인을 사용하는 서양 요리"라면서 "와인 대신 매실주로 대체해봤는데 맛도 좋고 반응도 좋아 메뉴에 추가했다"고 말했다.

#2: 경복궁 옆 서촌에 있는 7PM은 한국 식재료를 전통 유럽·지중해 요리에 응용한다고 표방하는 식당이다. 이 식당 최고 인기 메뉴 중 하나는 큐민, 고수, 파슬리, 카레 등 향신료가 잔뜩 들어간 '모로코식 살사' 소스를 곁들인 석화(굴)다. 그런데 메뉴판을 보면 이 요리와 가장 어울린다고 추천하는 술은 한국 전통주 문배술이다. 손님들 반응도 뜨겁다. 이 식당 단골이자 와인 애호가인 엄수정씨는 "문배술이 살사와 완벽하게 어울리면서 서로 맛을 한층 끌어올려준다"며 "와인보다 오히려 더 어울린다"고 호평했다.

조선일보

서울 청담동 ‘밍글스’의 저녁 전채요리인 ‘랍스터 & 푸아그라’. 푸아그라를 와인 대신 매실주에 절인다.


전통주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현대적으로 업데이트한 한식을 내는 레스토랑 '오늘'의 정덕영 지배인은 "손님들이 찾는 주류 트렌드가 과거 와인에서 막걸리를 지나 증류주·청주 등 전통주로 옮겨간 듯하다"면서 "와인을 주문하는 건 진부하다고 여겨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실제 이 식당에선 전통주 매출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전체 주류 매출 중 전통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2012년 12%에서 2013년 15%, 2014년 18%로 늘었고 2015년에는 20~25%를 예상하고 있다. "기업 CEO, 문화계 유명 인사 등 오피니언리더·트렌드세터들이 전통주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판매가 31만원인 '이강주' 8년산, 148만원이나 하는 '송화백일주' 등 비싼 전통주 판매가 늘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합니다. 고급 술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겠죠."

문배주양조원 5대 전수자 이승용 실장은 "문배술을 10년 동안 팔아왔지만 요즘처럼 행복한 적은 없었다"며 "2012~2013년 즈음부터 전통주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판매도 본격적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한국 식재료와 음식을 기본으로 하되 서양 조리법을 가미한 음식을 선보이는 오너셰프 레스토랑이 늘었다. 맛은 한식이지만 담는 법이나 내는 법을 요즘 사람들의 취향에 맞춘 '모던 코리안 레스토랑'도 사랑받고 있다. 한식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전통주에 대한 인식도 개선되고, '굳이 와인 등 서양술을 고집할 필요 없다'는 자신감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전통 명주를 소개하는 만화 '대동여주도'(www.facebook.com/drinksool)를 페이스북에 연재하는 이지민씨는 "전통주는 도자기 병에 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위스키처럼 투명하고 디자인이 세련된 유리병에 담기게 된 것도 새로운 시선으로 전통주를 보게 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신세계백화점 ‘우리술방’이 좋은 예다. 신세계백화점은 자사 디자이너들을 동원해 전통주 병을 새롭게 디자인해 재능기부 형태로 무상 제공했다.

지난해 추석 신세계백화점에서는 처음으로 전통주 선물세트 판매가 양주 선물세트를 앞지르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어 올 설에는 전통주 매출이 지난해 설과 비교해 무려 90.2% 신장했다. 세련되고 모던한 전통주 병 디자인이 이러한 매출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신세계백화점은 자평하고 있다.

‘레드 와인에는 고기, 화이트 와인에는 생선’같은 공식이 전통주에는 아직 없다. 전통주를 활용해 칵테일을 개발하는 ‘미스터 사이몬 바’ 사장 안성진씨는 “여러 재료를 섞어 하나의 맛을 탄생시키는 칵테일은 조화로워야 하는데, 전통주는 개성이 강해 튀기 때문에 칵테일 만들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오는 18일 전통주와 서양 음식 페어링(pairing) 행사를 준비 중인 7PM 김태윤 셰프는 “코스 요리를 즐기려면 도수가 세지 않아야 하는데, 전통주는 도수가 높아서 7~8코스를 하다 보면 너무 취해서 끝까지 즐기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력 끝에 음식과 잘 어울리는 전통주를 찾아냈을 때의 희열과 성취감이 대단합니다. 와인이 이미 난 길을 걷는다면, 전통주는 알려지지 않은 미지(未知)의 길을 내면서 나아간다 할까요.”

전통주라는 오래됐으면서도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글=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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