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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노숙인들 다 식구같아… 이젠 모두 自立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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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급식소 '토마스의 집' 삼총사… 김종국 신부와 박경옥·정희일氏]

23년간 매일 400명에 점심 제공

金, 출소자 재범 막기 위해 시작

朴, 식당 운영 총괄하는 살림꾼

鄭, 91세 최고령 '군기 반장' 할머니

3일 서울시 영등포구 '토마스의 집'으로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무료 급식소인 이곳은 매일 영등포 지역 노숙인들에게 따뜻한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 한 번에 26명이 식사할 수 있는 10평 남짓한 공간은 오전 11시 40분 배식이 시작되자 5분 만에 가득 찼다. 봉사자 20명이 아침 일찍부터 제육볶음, 불고기, 다시마무침, 미역국을 준비했다. 360여명의 노숙인이 차례대로 점심을 해결했다.

토마스의 집은 1992년부터 23년간 정기 휴일(목요일)을 제외하고는 늘 문을 열었다. 하루 평균 400명이 찾았으니 그동안 내놓은 점심이 거의 30만 끼다. 그 세월을 한결같이 해온 데는 총책임자인 김종국(66) 신부, 총무 박경옥(55)씨 그리고 최고령·최장기 봉사자인 아흔한 살 정희일 할머니의 노고가 컸다.

조선일보

23년간 노숙인 무료 급식소인 서울 영등포구‘토마스의 집’을 운영해온 세 주역. 왼쪽부터 정희일 할머니, 김종국 신부, 박경옥씨. /성형주 기자


문래동 성당 김 신부는 교도소 교화위원이던 시절 재소자들이 출소 후 거리를 배회하다 결국 다시 범죄를 저지르곤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들을 어루만지기 위해 떠올린 생각이 따뜻한 점심 한 끼를 대접하는 일이었다. 곧바로 성당에서 기부금 1200만원을 모아 보증금과 월세를 마련하고, 식기와 조리 도구를 샀다. 직접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건물을 청소하고 물건을 옮겨 왔다.

아무런 대가 없이 노숙인들에게 매일 점심을 주기란 쉽지 않았다. 월세나 식비가 부족할 때도 많았고 '왜 노숙인을 불러 모으느냐'는 주변 상인들의 항의도 버거웠다. 그는 "이런 내 처지도 몰라주고, 노숙인들이 술 먹고 와서 행패까지 부리면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정 힘드시면 그만두시죠'라는 주변의 권유에 오기가 생겼고, 내 세례명(토마스)까지 걸고 시작한 급식소를 포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박경옥씨는 한 주에 한 번 정도 봉사 왔다가 2003년부터 아예 총무 역할을 맡았다. 혼자 무료 급식소를 이끌며 힘들어하던 김 신부에게 든든한 우군이다. 박씨가 수소문해 싸고 질 좋은 식재료들을 공수해오면서 운영비가 많이 줄었다. 낭비되는 재료가 없도록 미리 가늠해 조리를 총지휘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박씨는 김 신부와 공공기관·기업·개인에게 후원을 부탁하는 일도 한다. 아픈 시아버지를 간호하면서도 기꺼이 발품을 팔아온 그의 노력 덕에 무료 급식소 운영은 안정을 찾았다. 박씨는 "곗돈 탄 것을 뜻깊게 써보겠다며 1000만원이나 건네주고, 매주 금요일 소고기를 보내거나 1년치 월세를 내주겠다고 나서는 분들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김치 20박스를 들고 봉사하러 왔던 커플이에요. 봉사를 마치고 남자가 여자에게 프러포즈하더니 승낙받았거든요."

정희일 할머니는 '군기 반장' 역할이다. 술 먹고 오는 사람, 음식을 남긴 사람, 건물 안에서 담배를 피우려는 사람들이 야단을 맞는다. 그 호통에 질서가 잡히면서 주변 주민의 불만도 줄었다. "내가 좀 못된 성격이어서 그런지 맘을 못 잡고 말썽 피우는 사람들을 보면 더 모질게 쏘아붙여. 근데 여기 오는 사람들 얼굴색이 좋아진 걸 보면 또 흐뭇해서 봉사를 끊을 수가 없단 말이지." 23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봉사하던 정 할머니는 지난 2일 하루 조퇴했다. 설 이후 체력이 많이 떨어진 탓이다. 정 할머니는 요즘 김종국 신부와 박경옥씨 그리고 자기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하루라도 더 노숙인들에게 점심을 해 먹이기 위해서다.

토마스의 집은 2년 전부터는 점심 값으로 200원을 받는다. '자존심 유지비' 명목이다. 노숙인들이 자립 의지를 가져주길 바라면서 만든 제도다. 박경옥씨는 "여기서 식사하고 힘을 내 다시 일을 시작하고, 자식들 잘 키워내는 사람도 종종 나온다"며 "이제는 모두 식구 같은 사람들이지만 많이들 자립해서 찾아오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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