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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슈퍼리치] “미국 가더니 성공했네”…고생 끝에 ‘아메리칸 드림’ 이룬 슈퍼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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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슈퍼리치섹션 김현일 기자]성공을 위해 미국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그렇게 성공을 바라는 이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미국 이민자들 중엔 옷을 팔고, 인형을 파는 것으로 돈을 벌어 억만장자가 된 이들도 있고, 높은 학력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전문직으로 슈퍼리치에 오른 이들도 있다. 최근에는 이민자 2세들이 IT 회사를 창업해 성공하면서 아메리칸 드림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도 언어가 다르고, 문화도 다른 낯선 땅에서 당장은 생계를 위해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온갖 일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고생 끝에 조그만한 자기 회사를 차리는 것을 시작으로 성공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이제 아메리칸 드림이 점점 사라지는 추세라고 하지만 ‘그래도 미국은 기회의 땅이고, 아메리칸 드림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민자 출신 슈퍼리치들을 살펴봤다.

▶장도원-장진숙 부부 포에버21 대표(한국 출신ㆍ66억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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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원 포에버21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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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원(61) 포에버21 회장은 서울 명동에서 커피배달을 하며 20대를 보내다가 1981년 미국 이민을 결심했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그는 ‘투잡’도 아닌 ‘쓰리잡’을 하며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서 그랬듯 미국에서도 커피숍에 들어가 일을 했고, 건물 경비원과 주유소 종업원으로도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이민 4년차에 접어들던 1984년 그는 부인 장진숙(52) 씨와 함께 LA 하이랜드 파크에 10대를 타깃으로 한 옷가게를 내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바로 포에버21의 전신인 ‘패션 21’이었다. 84㎡(약 25평) 규모의 작은 공간에서 출발한 이 옷가게는 첫해 7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며 시작했다. 이후 한인사회를 넘어 인기가 급상승하자 장 회장 부부는 옷의 콘셉트를 바꾸고, 이름도 포에버21로 바꿔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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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7일, 뉴욕에 새로 문을 연 포에버21 매장 (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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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버21은 현재 600개가 넘는 매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연매출 37억 달러를 올리는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됐다. 장 회장이 30여년 전 커피를 나르며 청춘을 보낸 서울 명동 한복판에도 포에버21 매장이 자리잡고 있다.

고졸 신분에, 변방의 이민자 출신으로 성공한 기업가가 된 그는 미국 이민 성공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에 대해 매우 뿌듯해한다. 장 회장은 “포에버21은 빈손으로 미국에 온 이민자들에겐 희망이자 영감을 준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패션사업을 ‘100m 달리기가 아닌 마라톤’에 비유하는 장 회장은 “미국의 법과 문화 그리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업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성공의 열쇠”라고 강조했다.

장 회장에 부부에 이어 딸 린다(Linda)와 에스더(Esther)도 각각 마케팅과 디스플레이를 담당하며 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세르게이 브린 구글 창업자(러시아 출신ㆍ288억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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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브린 구글 창업자(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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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ㆍ42)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모스크바대 출신으로, 엘리트 집안에서 자랐지만 이들 가정에는 한 가지 ‘핸디캡’이 있었다. 바로 유대인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러시아 내에선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

공산당은 유대인들이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 지식을 쌓는 것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물리학 교육과정에서 유대인을 제외한 것이 그 예다. 세르게이 브린의 아버지 ‘미카일 브린’도 천문학자라는 꿈을 포기하고 대신 수학을 전공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런 현실 때문에 브린의 가정은 미국 이민을 결심한다. 아들만은 자신과 같은 차별을 겪지 않길 바랐던 아버지는 1978년 9월 러시아 당국에 이민을 신청했다. 브린의 부모는 즉시 직장에서 해고됐고, 고정수입 없이 일용직을 전전하며 고초를 겪어야 했다. 세르게이 브린이 여섯 살 되던 1979년에 출국비자가 나오면서 비로소 브린의 가족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훗날 세르게이 브린은 “부모님이 러시아에서 꿈을 포기하면서까지 힘든 시간을 겪었던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나를 미국으로 데려와 준 것에 감사드린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으로 이민을 온 후 아버지는 메릴랜드대 수학과 교수로, 어머니는 미국국립항공우주국(NASA) 연구원으로 일을 했다. 아버지는 비록 고국을 떠나왔지만 아들이 러시아어를 잊지 않도록 가르쳤다.

세르게이 브린도 메릴랜드대에 들어가 컴퓨터공학과 수학을 전공하고, 스탠퍼드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을 공부하며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 여기서 만난 친구 래리 페이지(Larry Page)와 기숙사에 틀어박혀 컴퓨터를 갖고 놀며 검색엔진을 개발했고, 이것이 현재 구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얀 쿰 왓츠앱 창업자(우크라이나 출신ㆍ67억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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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쿰 왓츠앱 창업자(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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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쿰(Jan Koumㆍ39)은 2009년 우리의 카카오톡과 같은 모바일 메신저 ‘왓츠앱(What’s app)’을 개발해 선보였다. 이후 작년 2월, 페이스북에 190억 달러를 받고 팔면서 억만장자가 됐다. 그러나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의 삶엔 굴곡이 많았다.

얀 쿰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브 외곽지역 파스티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건설현장 소장이었지만 정작 그의 집엔 뜨거운 물이 안 나올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얀 쿰이 16세 때인 1992년 할머니와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의 불안한 정치상황과 반유대주의적 환경 때문에 미국 이민을 결심한다. 아버지는 나중에 뒤따라오기로 하고 셋이서 먼저 건너갔다. 다행히 미국 정부의 지원 덕에 방 두 개짜리 작은 집을 얻었지만 이민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얀 쿰은 식료품점 청소부로 일하며 생활비를 보탰고, 어머니도 베이비시터로 일했다. 특히, 남편 없이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학용품 살 돈을 줄이기 위해 우크라이나에서 이민올 때 펜과 공책을 잔뜩 싸들고 올 만큼 생활력이 강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얀 쿰은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히는 등 미국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나마 그가 흥미를 느꼈던 것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이었다. 헌책방에서 관련 서적을 구해 공부하고 그걸 다시 되팔아가며 독학했다.

그 와중에 1997년 우크라이나에서 홀로 지내던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도 암 진단을 받으면서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여전히 생계는 나아진 것이 없었다. 얀 쿰이 24세 때 결국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2009년 1월, 아이폰을 산 얀 쿰은 애플의 앱스토어가 새로운 산업을 낳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사업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달 뒤인 2월 24일 왓츠앱을 세상에 내놨다. 초반엔 속도가 느리고 잦은 오류 때문에 고전했지만 2009년 12월, 사진 전송기능까지 추가되면서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지금은 억만장자가 됐지만 얀 쿰은 뜨거운 물도 안 나오던 우크라이나에서의 한적한 시골 생활이 그립다고 말한다. 그가 왓츠앱 광고를 요란하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이작 라리안 MGA 엔터테인먼트 회장(이란 출신ㆍ11억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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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라리안 MGA 엔터테인먼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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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라리안(Isaac Larianㆍ61) 회장은 미국에서 장난감인형 회사 MGA 엔터테인먼트를 경영하고 있다. 리틀 타익스, 브라츠, 랄라룹시 인형이 MGA의 대표상품이다.

이란의 가난한 유대계 가정에서 출생한 라리안 회장은 17세 때 단돈 750달러만 손에 쥐고 혼자 미국에 건너왔다. 캘리포니아주립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한때 웨이터 생활을 하다가 1979년 수출입 사업에 발을 들였다. 이때 한국에서 값싼 황동 조각상을 들여와 팔기도 했다.

1980년대 초, 소비자 가전부문에 잠시 도전했던 그는 장난감 사업에도 욕심을 냈다. 1997년 내놓은 ‘노래하는 인형’은 대히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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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GA엔터테인먼트의 브라츠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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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에 8등신 미녀 스타일 일색이던 기존 인형들과 다르게 여러 인종의 모습을 한 인형들을 선보였고, 유행에 맞춰 옷을 입혀 성인들도 좋아했다. 2005년엔 바비인형을 누르고 연매출 8억 달러를 기록했다.

바비인형으로 늘 정상에 서있던 마텔(Mattel)사는 MGA가 지식재산권을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라리안 회장은 6년간 법적 분쟁을 치르며 막대한 소송비용과 법원의 판매금지 명령으로 한때 부도 위기까지 갔다. 그러나 재판부는 최종적으로 라리안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회사의 주식 82%를 소유한 그는 지난해 처음 포브스 억만장자 순위에 진입했다.

joz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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