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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사람답게 살려면 불의에 도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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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2001년 9월 취재진이 중국 연변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85세의 그는 이미 12일째 곡기를 스스로 끊고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족들의 만류도 소용이 없었다.

일체의 부고를 내지 말고 장례식에 초대할 12명의 명단을 직접 작성한 후였다. 그 명단엔 부인도 손자 손녀도 없었다. 오직 그가 혁명 동지로 생각하는 사람들뿐.

그는 바로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이자 마지막 생존자였던 김학철이다.

◇ 조선의용대, 그리고 김학철

중국 허베이성 타이항산 자락의 후좌장 마을노인들은, 1941년 12월 조선의용군의 치열하고 장엄했던 항일 전투 상황을 생생히 기억한다.

1938년 중국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는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 선생 등과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조선 청년들로 구성됐다.

조선의용군은 열악하고 굶주린 상황에서도 '조선의 대표'라는 생각에 모범적으로 처신했고, 전투에서도 마을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일본군을 마을 밖으로 유인해 싸웠다.

주민들 역시 전사한 의용대원의 주검을 일본군의 훼손을 피해 100리 밖으로 옮겨 묻어주는 것으로 보답했다. 이들 중에는 자녀의 이름을 '조선을 사랑한다'라고 지은 사람도 있었다.

이곳 전투에서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일본군에 체포된 분대장이 김학철이다. "잘린 다리는 일본 감옥에 묻혀 있어. 그러니 나는 이번에 죽으면 무덤이 두 개나 되는 셈이야, 허허."

그는 해방 후 북한의 김일성 독재를 비판하다 중국으로 쫓겨났고, 중국에서도 마오쩌둥의 독재를 문제 삼다 10년간을 중국 감옥에서 보냈다.

훈련단계에서 해방을 맞이한 광복군과 달리, 실제로 일본군과의 전투에 가담한 무장 독립 단체지만 남에서는 사회주의 단체라는 이유로 북에서는 김일성 독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어디서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 이념을 넘어, 독립운동가에서 인권운동가로

그는 한국 방문 중 지인들이 지병 치료를 위해 주선한 병원에서 사고를 당해 중환자가 됐다. 그러나 아무도 탓하지 않았다.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련련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병원·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

일제의 식민통치와 뒤이은 분단과 독재, 좌우대립 등으로 점철된 우리 민족 현대사에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그 자신이 하나의 현대사가 되어버린 김학철 선생이 파란만장한 삶을 뒤로한 것은 지난 2001년 9월 25일이다.

그해 6월 그의 마지막 한국 방문부터 스스로 숨을 거두기까지 마지막 22일은 독립운동가로서 그가 어떻게 삶을 살아왔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를 방송할 수 없었다. 그는 김일성 1인 독재와 우상화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인물이며 당시는 대북 유화정책이 정점을 치닫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2015년은 광복 70년, 분단 70년이 되는 해다. 한국전쟁과 4·19, 5·16과 그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개인적인 욕망과 집단적 이기주의, 그리고 이념적 주장이 서로 뒤섞여 다투고 있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는 김학철 선생의 마지막 유언은 '신념을 지키는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삼일절 특집 SBS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편에서는 그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인지, 그 답을 찾는 여정을 기록했다.

(SBS 뉴미디어부)

[SBS 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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