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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영어·수학보다 '나라' 배우는 게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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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만세운동' 기념사업 10년 이끈 김창묵 동찬기업 회장]

'동창만세' 주역 김덕원이 從조부… 일제 핍박에 홍천 갑부집안 몰락

홍천에 임시 거처까지 마련하며 피신처 복원·만세공원 조성 나서

조선일보

김창묵 회장은 최근 동창만세운동 기념사업에 집중하고있다. "이건 다른 의미의 교육이라 생각해요. 우리가 고생한 건 약해서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 영어·수학도 중요하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배우는 게 더 중요해요." /조인원 기자


남대문시장에서 무일푼 출신 옷장사로 자수성가한 김창묵(93) 동찬기업 회장의 3·1절은 특별하다. 지난 26일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3월 1일 강원도 홍천에서 열릴 '동창만세운동' 기념행사 준비로 분주했다. 1919년 고향인 홍천군 내촌면 동창마을에서 주민 1000여명이 만세를 부르다 일경(日警) 총탄에 8명이 순국한 강원 최대의 만세운동이다. 시위를 이끈 김덕원 의사(義士)는 이후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체포돼 심한 고문을 당했다. 김창묵 회장은 10여년 전 사재 100억원을 들여 동창만세운동 유적지를 만들었고 현재도 기념사업을 이끌고 있다. 김덕원 의사는 그의 종(從)조부다.

기념사업은 동창마을 일대에 김덕원 의사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3년이나 숨어 살던 '도깨비집'과 그가 자주 이용했던 산길을 복원하고 '만세공원'을 조성하는 작업 등을 포함한다. 무덤은커녕 사망 일시나 이유에 관한 기록도 없다. 이 때문에 김 회장이 전문가들과 직접 사료를 수집하고 고증하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김창묵 회장은 만세운동기념사업을 효과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동창마을 근처 척야산에 아예 거처를 만들고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동창만세운동은 홍천 갑부 집안을 몰락시켰다. 일경은 김덕원을 체포하려고 일가친척을 들쑤셨고, 천석꾼 재산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머니가 쌀을 얻으러 다니는 처지가 됐어요. 누가 선뜻 내주겠어요?" 김창묵의 어린 시절 기억은 대부분 배고파 울던 모습이다. 어른들은 일본식 교육을 수치로 여겼다. 못 배우니 가난은 한층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는 열여섯에 농업개척단원으로 만주에 갔다. 7년 뒤 어느 날 광복이 왔다. "여의도 1000평을 불하받아 농사짓고 영등포시장 음식 쓰레기로 돼지와 오리를 키웠는데, 술술 잘 풀렸어요."

그때 6·25가 터졌다. 피란지 마산에서 돌아오니 여의도엔 비행장이 들어서 있었다. "빈민으로 전락하는 건 순간인데 회복은 이렇게나 어려운 것이구나…. 솔직히 만세운동을 주도한 어른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죠."

1953년 형이 송아지 팔아 준 돈으로 남대문시장에 양말 노점을 열었다. 그러다 점포 얻고 미싱(재봉틀) 두 대를 들여 팬티를 만들었다. 1960년대 초 북유럽에 스웨터를 수출할 기회를 얻었다. 재료를 받아와 스웨터 짜서 보내는 것인데, 한국 1세대 수출 품목이다. "점점 자리가 잡혔죠. 기업가 소리도 듣게 됐어요." 그렇게 가난에서 벗어났다.

1982년 이른 봄이다. 새벽에 골목을 나서는데 맨발 소년이 신문을 돌리고 있다. 앞만 보고 달렸던 예순의 사업가는 소년 뒷모습에서 어린 시절 자신을 보았다. "저 애들도 배우지 않으면 나처럼 고생하겠구나 싶었죠."

그때부터 조선일보사에 배달원 장학금을 보내온 것이 33년째다. 지금까지 958명의 배달원과 자녀에게 모두 2억8000만원이 지급됐다. 조성된 기금은 10억원 규모다. 김창묵 회장은 고향인 강원의 지역 신문에도 매년 성금을 내고, 남대문시장 영세 상인 자녀들에게도 꾸준히 학비를 지원한다. 이렇게 30여년간 기부한 돈이 100억원이 넘는다.



[김충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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